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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개소리

[책을 읽고] 윤희숙, <정책의 배신>

by 히말

정부 정책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당연하다. 그 어떤 정부라고 그렇다. 정부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소리를 내야 한다. 비판이 없다면 착각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만나는 참사를 겪었다.


-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수상, 두 걸출한 인물의 영향뿐 아니라... (212쪽)


이런 걸출한 개소리가 책 초입에 나왔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책을 70%나 읽고 난 다음에 나오다니... 하하하!


좋다. 이 책이 전부다 걸출한 개소리는 아니다. 책을 읽으며 표시한 부분을 다시 훑어 보며 기록을 하니, 책의 내용은 대부분 기승전... 노조다.


- 최저임금 인상은 미취업자에 대한 차별이고, 최저임금 결정 구조에 노조가 끼어 있어 개판이 되었다.


- 근로시간 규제(52시간제)는 이미 좋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게나 좋은 정책으로, 노조의 요구를 정부가 무턱대고 수용했기 때문에 발생했으며, 미취업자와 덜 좋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다.


-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크게 줄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강성 노조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미취업자와 덜 좋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다.


- 연금 개혁이 좌초하고 있는 것도, 정년 연장이 감히 논의되고 있는 것도 노조 때문이며, 미취업자와 청년에 대한 차별이다.


- 연공에 따른 급여제도 역시 노조 때문에 개혁이 되지 않고 있으며, 청년과 미취업자에 대한 차별이다.


Last_Exit_to_Springfield_78.jpg 모든 게 다 노조 때문이다 ㅋㅋㅋ


아래는 그나마 말이 좀 되는 내용이다.


- 유럽의 노동시간 단축은 세법 영향이 크다. (사실 여부는 체크해 봐야 한다.)


- 택시 서비스에 대한 국민 불만이 높은 데도 불구하고 우버가 사업을 시작하고 철수하는 데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지식인의 역할이다. 다만, 자신의 주장을 중립적 시각에 의한 것처럼 포장하는 동시에, '걸출한' 인물들 운운하는 것은... 그냥 웃기지 않은가? 처음부터 자기는 신자유주의레기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겠다고 솔직히 말하고 시작했다면 사람이 우스워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생각을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하려는 가식을 버리라는 말이다.


나는 경불진의 <경제 시그널>을 읽고 분노의 리뷰를 한 적이 있다. 원하는 주장을 하려고 사실을 왜곡하는 아주 걸출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불진의 대척점에 있다. 정반대의 입장이고, 경불진과는 달리 수치 왜곡 대신에 그냥 주관적인 잡설을 늘어놓기만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만, 자신의 주장을 위해 걸출한 개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아주 똑같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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