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앨리스 로버츠,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제목부터가 딱 재러드 다이아몬드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게다가, '개'로 시작한다. 인류의 친구라는 바로 그 댕댕이 말이다. 아무리 두꺼워도 이런 책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즐겁게, 아껴 읽었다.
그런데 배신이라는 걸 당했다. 이 책은 '닭' 파트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그 정체는 딱 한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지 않으면서 GMO를 옹호하는 홍보 팸플릿'. 이런 걸 들이미는 인간과는 토론이란 걸 할 수 없다.
- (GMO의 위험은 크게 세 가지로 제기되는데,) 이 가운데 첫 번째는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듯하다. 유전자 변형 식품이 인간의 건강에 어떤 종류의 위험을 준다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457)
논리학에서 소위 '우물에 독풀기'라고 말하는 기법이다. 네가 지금 이런 주장을 하려 것 같은데, 그건 개소리니까 짜지셈...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신공격도 독풀기지만, 토론 상대방 전체가 아니라 그의 핵심 주장에만 독을 풀어도 독풀기는 마찬가지다.
나쁘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괜찮다는 게 왜 헛소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건 마치 유죄추정의 원칙과도 같이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니까.
다만, 저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나니까, 내 눈에는 이런 표현도 눈에 들어왔다.
- 세계 곳곳에서 350억이 넘는 사람들이 주식으로 쌀을 먹는다. (439)
지구가 아니라 세계라고 하는 걸 보니, 우주 변방 어딘가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하이브 월드라도 있는 모양이다.
이 책의 원제는 <Tamed>다. 제목에 충실하게 길들임의 역사만 얘기했다면 참 재미있는 책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은 아래 문단으로 요약될 것이다.
- 동물이 길들여지는 데는 3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동물이 인간을 선택해 다가온 경우다. 개와 닭이 그런 예다. 둘째는 동물이 인간의 먹잇감으로 길러진 경우다. 양, 염소, 소 같은 중대형 초식동물들이 대표적이다. 셋째 경로는 인간이 작정하고 동물을 비식용 목적으로 길들이는 것으로, 말이 대표적인 사례다. (660-661)
또한, 우리 인간 역시 스스로를 길들이고 있다! 우리는 선조들에 비해 작은 턱과 치아, 납작한 얼굴을 가지게 되었고, 남성은 공격성이 줄었다. 이를 '가축화 증후군(domestication syndrome)'이라 한다. 이는 인간 집단이 커지면서 필요했던 특질, 즉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되면서 일어난 부산물일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아주 멍청한 개인적 맹신을 포장하는 데 쓰였다는 게 분할 뿐이다. 아래는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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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염기 돌연변이는 유전체의 진화적 역사를 보관하는 훌륭한 지표다. 자주 일어날 뿐 아니라, 대세에 별 영향이 없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62)
- 길들여진 여우는 인간의 손짓과 시선에 주의를 기울였다. (83) - 인간의 손짓에 반응하는 건 개뿐이라고 들었다! 원숭이도 못한다는 말이다.
- 유라시아 늑대 유전체의 25%가 개에게서 유래했다. (114) - 작용과 반작용. 길들여진 집단과 야생의 집단은 언제나 영향을 주고 받는다.
- 인류학자들이 원시 생활을 영유하는 부족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다. 단연 1위는 꿀이었다. 구근은 항상 꼴지였다. 그러나 구근 식물은 낮은 선호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식생활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의지할 수 있는 식량원이기 때문이다. (331)
- 대부분의 닭은 빨리 자라서 6주만에 도축된다. 아직 뼈끝이 연골에서 뼈로 굳어지기도 전의 병아리다. (386)
- 조류는 군데군데 흩어진 림프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림프절 같은 독립기관은 없다. (395)
- 개나 고양이뿐 아니라 말도 인간의 표정을 읽는다. 한 연구에서는 말에게 인간의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는데, 화난 표정을 볼 때 말의 심박수가 증가했다. (567)
- 야포니까 쌀이 서쪽으로 퍼져나가면서 인디카 쌀과 교배했듯이, 카자흐스탄 사과가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유럽 사과와 교배했듯이, 현생인류의 조상은 네안데르탈인과 교배했다. (628)
-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빠져나간 직후인 듯하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데,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에게는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 (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