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앤디 위어,<프로젝트 헤일 매리>
*** 이 리뷰에는 중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언제나 그랬고요. 당신은, 당신이 쓴 논문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과학자로서의 전도유망한 미래를 포기했어요. 당신은 쿨한 선생 노릇을 한다는 이유로 당신을 숭배할 아이들이 있는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당신 인생에는 연애 상대도 없죠. 연애 상대가 있다는 건 상심을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요." (835쪽)
시작부터 스포일러다. 하지만, 일단 처음부터 이 소설을 훑어보자.
주인공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깨어난다. 컴퓨터가 묻는다. 2+2가 몇이냐고. 이건 뭐, 빈 차를 털러 들어갔다가 갇힌 남자의 이야기나, 인질범에게 잡혀 관 속에서 깨어난 남자의 이야기 같다. 마비가 풀리자 주인공은 4라는 명쾌한 대답과 함께 음식을 받아 먹는다. 너무 맛있다! 그런데 나는 누구지?
조금씩, 단편적인 기억이 돌아온다. 이제 이름을 기억하는 수준이 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이름을 기억해야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그런데, 어디에 갇혀 있는 상황인지 파악해 보려는 자신에게 놀라는 주인공. 꽤 복잡한 물리 법칙을 암산으로 해결하는 거 보니 좀 독특한 경력의 사람인 듯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 낸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을 기억해 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프로젝트 헤일 매리가 뭔지, 무얼 해야 하는지는 기억해낸다. 중요한 건 그거니까.
태양이 어두워지는 현상이 전 세계에서 관측된다. 조사 결과,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는 미생물이 원인으로 밝혀진다. 박테리아를 먹는 바이러스는 박테리오파지, 그래서 이 미생물은 별을 먹는 미생물, 아스트로파지라고 명명된다.
아스트로파지는 이산화탄소를 매개로 분열하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태양계에는 마침 금성이라는 아주 딱 좋은 번식처가 있다. 태양을 먹고 자란 아스트로파지는 금성으로 날아와 번식을 하고, 다시 태양으로 돌아간다. 이럴 수가. 인류가 멸망하는 방식은 결국 이것이었던가.
전 세계 과학자들이 동원되어 해법을 찾는다. 그러던중 타우세티라는 별은 아스트로파지의 번식 범위 안에 있음에도 밝기가 감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 주인공이 깨어난 곳은 우주선 안이고, 그 우주선은 지금 타우세티에 와 있다. 타우세티가 어떻게 아스트로파지를 이겨내는지 알아내서, 지구에 그 해법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다! 지구시간으로 13년에 걸친 항해 도중 두 명의 동료는 죽었고, 그만 살아남아 타우세티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딱 UFO 모양인 물체가 불과 200미터 거리에 와 있다. 인류 최초의 근접조우. 그 비행체에는 40에리다니에서 온 외계인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계인은, 주인공이 줄곧 주장해온 대로 물 기반 생명체가 아니었다. 섭씨 200도가 넘는 기온과 29기압의 행성에서 사는, 딱딱한 피부와 수은 순환계를 가진 생물. 주인공은 그에게 로키(Rocky)라는 이름을 붙인다.
청각과 촉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화음으로 소통하는 외계인. 로키와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아스트로파지에게 포식자가 있음을 알아낸다. 그렇다. 타우세티가 안전한 이유는, 타우세티 제3 행성에 존재하는 포식자 때문이었다. 제3 행성의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번식을 하러 온 아스트로파지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혀 수를 늘리지 못하고, 그 때문에 타우세티에서 에너지를 잡아먹는 아스트로파지의 수는 늘지 못한다. 타우세티의 아메바라는 의미로 주인공은 이 포식자를 타우메바라 명명한다. 타우메바를 데려가면 두 문명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은 테드 창과 비교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된 하드 SF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테드 창처럼 따분하지 않고 서사적 흥미진진함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직면한 위기를 극복한 주인공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 그것을 다시 풀어내는 주인공. 뛰어난 지적 능력과 불굴의 의지의 조합. 적어도 책의 중반까지, 주인공 그레이스 박사는 내게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와 비슷해 보였다.
이 소설의 첫 번째 기습 공격이 타우세티에서 만난 외계 생명체였다면, 두 번째이자 가장 예리한 기습 공격은 주인공에 관한 것이다. 이 글 초입에 인용한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어떤가? '마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는 목을 쭉 빼고 문 쪽을 돌아보며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는 없어!"
"아이들만 생각하세요, 그레이스." 그녀가 문간에서 말했다. (841쪽)
자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로 깨어나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이 소설의 첫 장면은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과거 회상 장면은 식상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런 식으로 장면을 병치하며 진행하는 서사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바로 그런 식상한 장치가 갑자기 비밀병기로 탈바꿈하는 것이 이 소설의 제23장이다. 주인공이 과거를 조금씩 기억해낸 것은, 다름 아닌 약물 때문이었다. 냉철한 집정관의 모습을 보여주던 스트라트는 사실은 냉혈한이었다. 주인공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자살 미션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끌려온 것이었다.
지구와 에리다니를 구하기 위해 각자의 모성으로 돌아가는 주인공과 로키. 4년 동안 자는 것도 좋겠지만, 주인공은 식량이 허락할 때까지는 일단 깨어 있기로 한다. 그런데 또 일이 발생한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타우메바가 밀폐용기를 뚫고 탈출한 것이다. 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대성 이론도 모르고 있던 에리다니 문명의 로키가 이 문제를 해결했을 리가 없다. 주인공을 갈등에 빠진다. 어차피 프로젝트 헤일 매리는 자살 미션이었다. 준비해 둔 초소형 우주선에 타우메바와 설명서를 넣어 지구로 보내면 태양은 살릴 수 있다. 에리다니는 주인공이 직접 타우메바를 들고 가면 살릴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주인공은 굶어 죽는다. 에리다니에는 주인공이 먹을 만한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에리다니는 재료공학에 있어 지구 문명보다 뛰어나고, 생물학 등 여타 과학 분야는 지구만큼 발전했기 때문이다.)
별로 길게 고민도 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주인공. 지구로 비틀스(타우메바가 실려 있는 소형 우주선)를 쏴버리고, 자신은 헤일 매리를 이끌고 로키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그는 친구와 친구의 문명을 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여기서 빛의 속도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아이들 열두 명이 발톱을 들어 올린다. (10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