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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18. 2017

오베르의 빈센트, 70일의 기록

[서평] 반 고흐, 마지막 70일

이 책은 빈센트의 마지막 70일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나날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1년간의 입원을 통해 빈센트의 건강은 매우 좋아졌으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부정적이거나 반사회적인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그의 죽음은 오히려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빈센트는 계속해서 테오의 아내 조, 그리고 조카 빈센트의 건강을 염려했으며, 테오 가족이 파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오베르(Auvers)로 이사와서 건강하게 살기를 바랬다.

빈센트가 하숙했던 오베르의 라부 여관



가셰 박사를 비롯한 이웃들과도 무리없이 지냈으며, 아이들을 그린 초상화가 여럿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하며 경계했다는 세간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베르에서의 마지막 70일을 포함하여 빈센트는 삶의 대부분을 풍족하게 살았다. (시엔과 파리에서 지낸 시절만이 예외였을 것이다.) 아래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풍족하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집을 하나 더 마련했으면 한다. 1년에 365~400프랑 정도를 더 쓰고 쓰지 않고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1890년 6월 10일,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책 46쪽)

현재의 택배 책임자 정도의 역할을 맡은 우체국 직원 룰랭의 월급이 135프랑이었다. 이 사람은 아내와 자식 셋, 다섯 식구를 부양했다. 테오가 사망했을 때, 부쏘 발라동 화랑은 미망인에게 8천 프랑을 지급했다. 테오는 부쏘 발라동 파리 지점의 책임자로서,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취급하는 단 두 개의 화랑 중 하나를 지휘하는 유명인사였다.

빈센트는 생활비조로 테오에게서 한 달에 200프랑 이상을 받아 왔다. 캔버스와 물감 등 그림에 필요한 물품은 별도로 받았다. 룰랭의 월급이나 테오의 퇴직금(?)과 비교하면, 빈센트의 생활비는 풍족한 편이었다.

이 책은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를 살펴보면서 오베르에서 화가가 보낸 마지막 70일을 조명해보는 제1부, 같은 기간 빈센트가 그린 그림 50여점을 살펴보는 제2부, 그리고 빈센트의 그림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테오의 미망인, 즉 요안나 봉허의 삶을 살펴보는 제3부로 되어 있다.

제2부에서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저자들(역사학자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과 조형예술가 페터르 크나프)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유명세 덕에 위작 시비가 원체 많기도 하지만, 특히 오베르 시절의 그림들 중에는 위작 시비가 많은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저자들은 빈센트의 다른 그림에서 보이는 붓터치를 중심으로 위작 여부에 접근한다. 하지만, 예술을 그 자체로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확고한 생각이다. 예컨대 그들은,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나 <가셰 박사의 초상>은 빈센트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걸작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 귀스타브 라부나 가셰 의사의 아들이 그렸다고 해서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일까? 물론 반 고흐의 것이 아니라고 증명된다면 그 감동은 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그림이 하나의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68쪽)

반면, 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들>의 경우, 빈센트가 그리지 않았다면 "과연 국립미술관에 걸렸을지 의문의 든다"라고 솔직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빈센트의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오베르의 들판을 그린 그림 여러 점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구름이 낀 하늘 밑 오베르 근교의 밀밭> 같은 그림은 마음에 든다. 보는 이와 매우 가까운 화면 앞쪽과, 지평선까지 사라질 정도로 멀게 물러나 있는 뒤쪽의 대비가 좋다. 빈센트에게 오베르의 밀밭은 세잔에게 자 드 부팽과 같은 존재였나보다.

빈센트 반 고흐, <구름이 낀 하늘 밑 오베르 근교의 밀밭>, 카네기 미술관, 피츠버그



오베르 시절 그림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그림은 아마도 <나무뿌리>일 것이다. 빈센트의 화풍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추상화의 단계로 진행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독특하기는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 <나무뿌리>, 반 고흐 미술관, 암스트레담



요안나 봉허, 즉 테오의 미망인은 빈센트와 테오가 사망한 이후 독립적인 삶을 살면서 빈센트의 예술이 세상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살았다. 민주사회노동당에 가입하여 제2서기관으로 활동(1905년)할 정도로 깨어 있는 여인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테오를 빈센트의 옆자리로 이장하기 위해 프랑스와 벨기에의 영사관을 뛰어다녔고, 결국 두 형제가 나란히 쉴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테오가 사망한 후, 요안나는 부쑴에 정착하여 빌라 엘마라는 고급 저택을 임차하여 하숙집을 운영했다. 하숙집을 시작할 당시 쓴 아래 일기는 운명을 대하는 그녀의 능동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 둘이 먹고살기 위해 하숙생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빨래하고 청소하는 기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테오는 내게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 그는 내게 아이 말고도 또 하나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빈센트의 작품. 나는 그것을 세상에 보이고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요안나의 일기, 1891년 11월 13일, 책 313쪽)

오베르에 있는 반 고흐 형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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