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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l 24. 2022

릴리 킨트너 vs 아이린 애들러

빠져드는 여성 캐릭터들

*** <보헤미아의 스캔들>, <죽여 마땅한 사람들>, <태백산맥>, <시체 읽는 남자>, <해리 포터> 등 스포일러가 넘쳐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홈즈 전집을 읽고 있는데, 홈즈와 왓슨이란 캐릭터에 빠져드는 걸 막을 길이 없다. 문학 역사 상 최고의 매력도를 지닌 캐릭들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홈즈와 왓슨은 이미 시대를 초월한 셀럽 아닌가.


홈즈 시리즈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여성 캐릭이라면 단연 아이린 애들러다. 그녀의 특징에 관해 간단히 정리해보니, 피터 스왠슨의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릴리가 떠올랐다. 내가 빠져드는 여성 캐릭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작가 스왠슨이 희망하는 릴리 역 배우, 에이미 애덤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릴리 킨트너


그냥 책도 두 번은 잘 안 읽는데,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릴리라는 캐릭에 빠져드는 바람에 두 번 읽었다. 그만큼 대단한 캐릭이다.


일단, 그녀는 아름답다. 억만장자인 테드가 그녀에게 작업을 걸었고, 참고인으로서 그녀를 한번 조사했을 뿐인 킴벌 경감은 그녀에 관해 시를 쓰기도 했다. 학창시절, 미란다가 릴리의 눈을 바라보는 장면은 릴리의 아름다움을 호소력 넘치게 보여준다.


아름다운 여성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일단 팜 파탈(Femme Fatale)이란 틀로 정형화되기 쉽다. 그러나 릴리는 그렇지 않다. 릴리의 살인 행각은 철저한 계산과 과감한 실행력에 의해 진행된다. 미란다의 경우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브래드를 움직이려 한 미란다에 비해 릴리는 논리로 그를 설득한다.


그런 그녀가 킴벌을 살해하는 데 실패하고 쓸데 없는 실수까지 저지르는 것은 다소 의외다. 그러나 어차피 소설은 끝나야 하는 시점까지 왔다. 갑자기 부동산 개발이 이뤄지는 것도 소설이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릴리 킨트너는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아름다운 여성 캐릭터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녀는 전형적인 팜 파탈로 들리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미끼로 쓰는 대신 머리를 쓰고 과감히 행동하여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다.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이린 애들러의 가장 유력한 모델로 추정되는 릴리 랭트리 - 이름이 릴리다!


<보헤미아 스캔들>의 아이린 애들러


이 단편을 홈즈의 로맨스라고 부른다면, 정말 시대를 아득히 초월하는 뉴 타입 로맨스다. 아이린과 셜록은 딱 세 번 마주친다. 변장한 홈즈가 그녀를 폭도로부터 구해줄 때, 그가 결혼식에 증인으로 입회할 때, 그리고 승리에 도취된 홈즈가 잠깐 외출했을 때다. 마지막 순간은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세 번 다 진정한 개인 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는 점이다. 첫 두 장면에서는 홈즈가, 마지막 만남 때는 아이린이 변장을 한 상태였다. 둘이 진정으로 만났다고 할 만한 것은 오히려 아이린이 홈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첫 두 만남 때까지, 아이린은 홈즈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당했다. 그러나 상황을 알아챈 아이린은 곧바로 행동에 나선다. 시간적 여유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아이린은 사진을 빼돌리는 것만으로 모자라 홈즈를 정탐하러 직접 나선다. 홈즈에게 편지를 남기는 건 덤이다.


홈즈는 자신의 최대 실수로 이 사건을 거듭 언급한다. <입술이 비뚤어진 남자>에서는 자신의 실수를 한참 나중에 깨달았고, <노란 얼굴>에서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지만, <보헤미아 스캔들>의 경우 홈즈는 상대방과 직접 대결하여 패배한다. 더구나 의뢰를 해결하기 직전에 반격당한 것이므로, 스포츠로 말하자면 막판 대역전극이다. 상대방이 여성인 것 또한 당시 사회상으로는 더욱 부끄러운 패배라 할 만하다.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에서 홈즈는 자신이 지금까지 4차례 패배했다고 말하면서, 3번은 남자에게, 1번은 여자에게라고 이야기한다. 굳이 성별을 언급할 정도로 홈즈에게 이 사건은 깊은 인상으로 남은 것이다.



올해 읽은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들


<시체 읽는 남자>의 후디에는 독특한 조합을 뽐낸다. 아름답지만 중년이 지난 나이이고, 오랑캐 출신이며, 무엇보다 시각장애인이다. 그러나 소설 내 인물들에게 그녀가 뿜어내는 마성의 오라는 책 바깥의 나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고상한 귀부인 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잃자 목숨을 버렸다. 내가 가장 놀랐던 장면이다. 납득이 안 된 게 틀림없다.


엘리샤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캐릭터성은 미약하다


<사일런트 페이션트>의 엘리샤는 다소 정형적이다. 어떤 남자라도 거부할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이자 천재 화가다. 그녀에게 독특한 점이라면 현재 처한 상황 정도일 것이다. 일기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과거 모습, 즉 정상 상태는 흔해 빠진 신경증 환자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그녀의 승리는 상대방의 자만심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내가 굉장히 종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소설에 살아 있는 캐릭터는 주인공 하나뿐이다.


<한순간에>의 주인공은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에서 흔히 보는 타입이다. <작은 아씨들>의 조라고 보면 된다. 이 소설의 '뷰티 퀸' 포지션은 주인공의 단짝 친구인 모다. 그녀는 또한 '프린스' 포지션의 카일과 맺어지기까지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은 단연 카일이었다. 요즘 이런 천사가 어디 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딘가 있을 수도 있잖아. (<인사동 스캔들>의 김래원 톤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태백산맥>은 대하소설이다. 대하소설이 늘 그렇듯 너무 많은 인물이 나오고, 그들 대다수는 그냥 설정에 불과하다. 염상구, 하대치와 같이 살아 있는 캐릭이 몇 있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그중에 여자는 없다. 중요한 여성 캐릭으로는 소화, 외서댁, 이지숙 정도가 있지만 입체성이 매우 부족하다. 소화는 비련의 여주인공, 외서댁은 빨치산 여전사, 이지숙은 사랑에 갈등하는 사상가로 간단히 정리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


<해리 포터> 시리즈는 영화가 워낙 유명하고, 캐스팅에 조앤 롤링이 직접 개입하기도 했기 때문에 영화 배역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캐릭터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소설에 예쁘다는 묘사가 전혀 없는 허마이오니가 단연코 최고 미인인 참사(?)가 일어났다.


소설에서 절세미인으로 묘사되는 것은 초 챙이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초 챙 역의 배우 케이티 렁은... 조앤 롤링 본인도 케이티 렁의 영국식 액센트가 마음에 들어 캐스팅했다는 변명을 해야 했을 정도다.


허마이오니에 이어 루나 러브굿도 실제 배우가 더 예쁘다 (그런 의미라면 스네이프가 제일 심각한 미화인데...)


영화 캐스팅 때문에 꼬인 또 하나의 캐릭터는 루나 러브굿이다. 소설 묘사는 그녀가 괴짜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캐스팅된 배우의 외모는 허마이오니와 초 챙을 동시 타격하게 생겼다.


외모에 대한 평가는 여기까지 하고, 캐릭터 자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허마이오니는 전형적인 모험소설 여주다. 길게는 <제인 에어>, 짧게는 <빨강머리 앤>에서 비롯된, 남주의 액세서리가 아닌, 자체적으로 캐릭터성을 가지는 여성 캐릭터다. 그러나 허마이오니는 모험소설 여주라는 전형성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캐릭터 관련해서 제일 놀랄 만한 사실은 그녀가 나중에 해리가 아닌 론과 맺어진다는 정도?


초 챙은 더더욱 이야기 거리가 못된다. 성장형 남주가 거쳐가는 여성 캐릭터라는 전형적인 빌드다. 해리와 맺어지는 지니 위즐리는 그야말로 갑툭튀다. 벨라트릭스는 파격성이 두드러지는 편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매우 평면적인 캐릭터다. 차라리 드레이코의 어머니인 나시사 말포이가 더 입체적인 편이다.


루나 러브굿은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로, 극 후반부에서 허마이오니 수준의 활약을 하고 뻔한 캐릭터들의 범람에 한줄기 신선함을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그녀 또한 괴짜 캐릭터라는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주목할 만한 여성 캐릭터가 없다. <해리 포터>의 최고 캐릭터는 단연 세버루스 스네이프다. 작가가 무엇을 목표로 했든, <해리 포터> 서사는 스네이프에서 시작해서 스네이프로 끝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픽션에서 우리는 비일상적인 것, 희귀한 것을 만나고 싶어 한다. 스네이프의 삶이야말로 바로 그런 것이다.



결론


아이린 애들러나 릴리 킨트너 같은 캐릭터는 희귀하다. 만나기 어렵다. 책을 더 읽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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