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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과 우울증

[책을 읽고]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by 히말

문화적 관점에서 보는 우울증


동남아와 중국 남부에는 '코로'라는 불안증이 있고, 인도와 네팔에는 '다트 증후군'이라는 불안증이 존재한다. 일본에는 '대인공황증'이라는 증세가 인정된다. 한국의 화병과 마찬가지인 병들이다.


DSM 4판부터는 이러한 병증을 문화권 증후군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반대 방향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즉, 우울증이란 진단은 대단히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맥길대학교 로렌스 커메이어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느낌을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공개하고마음의 고통을 의료 문제로 보는 성향을 지닌 것은 미국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73쪽)


미국이라는 좁은 범위가 아니라 '서구적인 현상'이라 한다면 동의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중세에 마녀 사냥을 당하던 여자들이나, 고대 그리스 시대에 배를 잘못 탔다가 노예로 한 20년 생활하던 사람들이 현대의 우울증과 비슷한 증상을 과연 겪지 않았을까.


문제는 DSM이라는 대단히 작위적인 기준에 따라 일단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나면, 현대 의학은 그것을 고쳐야 하는 상태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전두엽 절제술이 퇴출된 지 아직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전기자극술은 아직도 시행된다. (정신과 의사이자 우울증 환자인 린다 개스크는 <당신의 특별한 우울>에서 전기자극술을 받아봤다고 말하고 있다.)


우울증을 겪던 중세 여자들은 마녀라는 이름으로 사냥당했고, 조선 시대 여성들은 화병에 걸렸다. 백석의 시, <흰 밤>에 나오듯 수절을 강요당한 과부들은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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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여성의 질병


우울증은 실제로 여성 쪽의 발병률이 훨씬 높다. 한때 여성들에게만 진단되었던 '히스테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울증은 여성의 증상을 기준으로 규정된 질병이다. 따라서 현재의 진단 기준으로 남성의 우울증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134쪽)


이는 대부분의 임상 시험이 가지는 문제, 즉 환자가 성인 백인 남성이라고 가정되는 점이 우울증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생각이다.


수많은 우울증 관련 서적에 나오듯, 우울증은 어떤 계기에 의해 발생한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현대인들은 모두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수준에서 상처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아무래도 아들보다는 딸에게 트라우마적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더하여, 문제는 어린 시절에 국한되지 않는다. 화병이라는 것도 성인 여성의 병이다.


"가족들에게도, 회사 사람들에게도, 애인에게도 감정 노동을 하고 많은 에너지를 쏟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한 아무런 보상이 없어요." (244쪽)


특히 딸과 엄마 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엄마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엄마 역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고,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그 대상은 대개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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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결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인터뷰 응답자들에 대한 감정적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감은 있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우울증에 관한 다양한 고찰은 생각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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