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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관찰

[책을 읽고]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1)

by 히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그동안 읽으려고 시도한 것이 여러 번인데, 이번에야 읽었다.


길이도 짧은데, 그동안 왜 못 읽었을까? 재미가 없어서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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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반이 죽었다는 소식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사 이동에 우선 관심을 가지고,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등 성가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그렇듯 그들 역시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14쪽)


러시아 작가들을 보면 이르다 싶은 나이에 죽은 경우가 많다. (본인이 자처한 것이지만) 요절로 분류되는 푸시킨은 물론, 고골도 체호프도 이른 죽음을 맞았다. <가난한 사람들>에 나오는 묘사를 보면 당시 러시아의 혹독한 환경 때문인 듯도 싶다. 추워서 문도 못 여는데, 실내 공기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게다가 알코올 중독은 기본이다. (오래 살려면, 역시 톨스토이처럼 부자여야 한다.)


그렇게 죽음을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환경이라면, 정말 저런 생각을 할까?


***


이반은 낫지 않는 옆구리 통증으로 죽음을 예감한다. 가족들조차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한 사람, 게라심만이 그를 진정으로 위해준다. 게라심이 왜 그러는지 독자인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 젊고, 선량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 SNS가 있는 세상이었다면 게라심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죽음은 어느 날 그냥 휙 찾아온다. 죽음 직전의 순간, 이반은 고통도 죽음도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반 일리치의 고통이 그러고도 두 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152쪽)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톨스토이가 임사 체험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 직전 평온해지는 이반의 묘사는 임사 체험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문필가들이 이 단편을 찬양했다.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이렇게 써놓고 두 번을 꼼꼼하게 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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