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2)
죽음이란 동서고금 문학의 절대적 주제 중 하나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이런저런 사색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죽음에 관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햄릿>의 독백일 것이다.
To die, to sleep
To sleep- perchance to dream. Ay, there's the rub! (<햄릿>, 3막 1장 중에서)
죽음이 단지 잠에 지나지 않는다면 두려울 것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꿈을 꾼다면?
죽음의 핵심은 공허일까, 고통일까?
만약 고통이라면, 죽음이 단지 잠이 아니라 꿈을 동반하는 것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한편, 죽음의 고통에는 우리가 아는 측면도 있다.
바로, 죽음에 선행하는 고통이다.
그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한 지인은 그가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
'사흘 밤낮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단 말이지. 그런 일이 언제든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거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27쪽)
실제로 죽기 직전, 이반 일리치는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계속 질러댔으며, 이를 듣는 가족들조차 고통에 몸부림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반의 고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고통조차 줄여주지 못하는 의사에게 이반은 마침내 짜증을 내는 지경에 이른다.
의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자가 짜증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 이반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물론 이반에게 고통은 두 개의 차원에서 다가온다. 신체적 고통, 그리고 정신적 외로움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덜어주는 것이 순박한 농부, 게라심이다.
아내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몰라주는데, 게라심만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이반은 오직 그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게라심이 옆방으로 가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131쪽)
이반이 죽고 나서야 애도를 표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게라심은 그의 죽음에 대해 오히려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보게 게라심,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다 하나님의 뜻인걸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요." 게라심이 농부답게 희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31쪽)
우리는 죽음을 외면한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회피한다.
나이가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죽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죽음은커녕 노화조차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늙고 죽는다.
그러나 이 명제를 우리는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린 아이였을 때나 대학생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늙음과 죽음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개념이라 느낀다.
죽음에 대한 책을 늘 찾아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