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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01. 2018

아주 데카르트 납셨네

[서평] <유병재 농담집 블랙코미디>

촌철살인이 뭔지 보여주는 유병재의 역작. 시작부터 강렬하다. 제목은 '변비'.

똥이 안 나온다.
난 이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16쪽)


'멘토'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다. 잘난 사람들에 맞춰 살려고 해봤자 피곤하니까, 분수 맞춰 살자는 이야기를 저자는 후배에게 한다. 멋있는 사람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저렇게는 되지 말자' 하는 사람을 정해서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

담배를 피우던 나의 일장연설에 후배는 공감하는 눈치였다. 꽤 으쓱해진 나는 바닥에 침을 카악 뱉었고 후배는 뱉으려던 침을 삼켰다. 나는 자리에 돌아가려고 꽁초를 바닥에 비벼 껐고 이를 본 후배는 급하게 재떨이를 찾았다. (20-21쪽)

촌철살인이기는 한데, 너무 자학적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의 자부심'이란 글은 또 이렇다.

잊지 말자. 난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잊으신 모양이니까
나라도 잊지 말자. (22쪽)


2장 '분노수첩'으로 진행하면, 이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쿨과 싸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아는가?

쿨한 것: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
싸가지 없는 것: 니네는 아무래도 괜찮아! (90쪽)


이걸 구분 못 하고 싸가지 없는 걸 쿨하다고 하지 말고, 만약 영단어를 쓰고 싶다면 이 단어를 추천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소시오패스'.

'상처와 카리스마'라는 글은 정말 요즘 우리 사회에 딱 맞는 글인 것 같다. 오랜 군부 독재로 굳어진 단체주의가 아직도 건재해서 그런지, 새로이 인사발령이 난 사람에 대해 '단호한 리더십'이 있다느니, '불같은 성미지만 뒤끝은 없다'라느니 하면서 칭찬(!)하는 기사가 나곤 한다. 그냥 성질이 더러운 것인데 말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겁내는 건
당신에게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냥 쉽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받게 될 나를 겁내는 것이지,
당신을 겁내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101쪽)


일간 뭐시기라는 우아한 사이트에 들락거리는 분들에게 헌정하는 글도 있다. 제목은 '합리주의자'다.

자기 일상 대소사엔 존내 감정적인 새끼들이 세월호 유가족분들 얘기만 나오면 무슨 논리 팩트 이성 기반에 합리주의 철학자들처럼 굴고 있네. 등신 쪼다 같은 것들이 아주 데카르트 납셨네. 씹새끼들. (114쪽)


제3장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같은 제목의 첫 글은 작은 일에 분개하고 정작 분개해야 할 세상의 거악에 잠잠한 자신을 탓한다. 왕궁, 그리고 거기서 벌어진 음탕에 분개하는 대신 여자 연예인의 SNS 사진에 분개한다. 독재자, 친일파에게 화내지 못하고 배달부에게, 발포 책임자에게 분노하지 못하고 걸그룹 팀명을 짓는 기획사 사장에게 화낸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137쪽)


'내가 결정되는 순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존재인지는,
대부분 담배꽁초 바닥에 버리고, 알바한테 반말하고, 엄마한테 짜증부리고,
이런 기억에도 남지 않을 미세먼지 같은 작은 순간들이 모여 결정되는 것 같다. (149쪽)


이건 뭐 사르트르보다 실존의 본질을 더 잘 표현했다.

'갑질'은 누가 하는가. 세상사 대개 그렇듯이 내로남불이지만, 사실은 내가 하는 것도 불륜이다. 내가 하는 것도 갑질이다.

나는 굽실대지 않는 사람을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갑질은 내가 하는 것이었다. (151쪽)


사실 갑질이라는 거창한 포장에 담지 않아도 이것은 귀중한 깨달음이다. 사랑받기 전에 사랑을 주라고 하지만, 먼저 인사하라고 하지만, 먼저 친절을 베풀라고 하지만, 우리는 사실 먼저 받기를 원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에게 뭔가를 먼저 기대한다. 그것이 권력 관계에 투영되면 갑질이 된다.

난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조차 미움받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166쪽)

그런데 그게 사람 아닌가. <미움받을 용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했던 이유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미움받는 것을 정말 두려워한다. 미움받게 되면 '여기에 있는 것이 괜찮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시미 이치로의 말처럼,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는 허락은 남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그 방법은 '타자공헌감'이다. 남을 돕되, 내가 도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기뻐하면 그만이다. 남에게 칭찬받기를, 인정받기를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미움을 받아라.

<유병재 농담집 블랙코미디> 표지 ©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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