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법>
또 <미네르바 성냥갑> 칼럼 모음이다. 움베르토 에코처럼 유명해지면 좋은 점은 역시 아무 글이나 쓸 수 있고, 굳이 이해나 동조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일 것이다.
젊은 시절,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추>로 접했던 에코. 기호학자로서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은 없다, 라고 말하기엔, 저 두 개의 소설은 너무 기호학적이다.
에코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그는 시민 교양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시민 사회가 가져야 하는 덕목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질서, 배려, 신중함 등등. 이런 덕목의 뿌리에는 교양이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으로 보인다. 마치 구한말 계몽 사상가들 같은 느낌이다.
딱한 유형의 독자들이 있다. 교양은 있지만 소설을 전체로 읽는 법을 모르고 단순히 여러 부분을 그때그때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자, 반어나 풍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 작가의 의견과 등장인물으이 의견을 구분할 줄 모르는 독자가 그렇다. (251쪽, 2011년)
존경하고 애정하는 작가인 에코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표현은 정신적 미성숙이라 할 만하다.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된다면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유시민 작가였다면, 저런 오해를 불러온 데는 작가의 잘못도 크다고 말했을 것이다. (송강호 배우 또한 작품에 대한 선구안을 논하기 전에 영화가 망한 데에 배우가 기여한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코는 또한 기자들을 꽤 싫어한 것 같다. 한국말에 기레기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그 단어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아시다시피 기자라는 직업은 감추어진 뉴스를 드러내기도 해야 하거든요” 나는 기자의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기자는 진실에 부합하는 뉴스만 전해야지, 진실을 지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8쪽, 2011년)
기자들의 무식함을 비웃는 표현은 이 책에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그는 필요 이상으로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기자의 말을 자기 마음대로 곡해하고 있지 않은가. 저 말을 한 기자의 속마음이 에코의 해석대로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조작을 하겠다고 대놓고 떠벌일 정도의 철면피가 과연 그렇게 많이 존재할까?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독설도 뱉어낸다. 휴대폰에 코를 박고 다가오는 한 여자를 보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어릴 때 벌써 없애 버렸어야 했다. (88쪽, 2015년)
에코의 혀가 날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날카로움은 정확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샤를리 엡도 사건에 대해, 그는 내가 하고 싶던 말을 아주 시원스럽게 대신해준다.
샤를리 사태에는 두 가지 기본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 쪽에서 끔찍한 테러를 저지르는 바람에 둘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내가 샤를리다!”라고 말함으로써 무례한 표현조차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만 높아졌다. 그러나 내가 만약 샤를리였다면 무슬림의 감정을 조롱하면서 고소해하거나 재미있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1쪽, 2015년)
샤를리 엡도 사태는 분명 샤를리 쪽이 먼저 잘못한 것이 맞다. 그러나 이슬람 쪽은 과잉방어를 해버렸다. 처음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 사태의 본질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버린 것이다.
에코는 2016년에 작고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건전한 지성을 가진 사회는 얼마나 행복한가. 2022년, 극우가 정권을 장악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에코 없음>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