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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23. 2023

안녕하세요, 로벨리 씨

[책을 읽고] 카를로 로벨리,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평 - 나는 실망했다


<시간>은 내가 애착하는 주제다. 이 주제로 쓰인 책은 만나는 대로 다 읽은 것 같다. 가장 좋았던 것이라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애덤 프랭크의 <시간 연대기>, 그리고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였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이 리디셀렉트에 떴을 때, 클릭하는 건 당연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이 책은 나를 크게 실망시켰다.  이 책에 나온 것이 (수학적 설명을 제외한) 루프양자중력 이론의 전모라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수학적으로 그건 정말 대통일이론(TOE)일지도 모른다.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온, 일반상대성과 양자역학을 하나로 묶는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론이 가져오는 통찰은 없다. (람다CDM 따위를 찾겠다고 우주를 헤매는 일은 안 하겠지. 그건 또 대단한 통찰이기는 하다.)


로벨리의 이전 책 중 하나인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어서 아주 예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가정하면, '흐르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고, 우주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장벽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존재인 우리 인간은 세상의 퇴색한 모습만 보기 때문에 시간을 살게 됩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117쪽)


지금 다시 읽어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 서술은 분명 우주에 어떤 실체('장벽')가 있으며, 인간이 자신의 한계로 인해 그걸 꿰뚫어보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무슨 말이냐 하면, 로벨리의 이 주장은 줄리안 바버(Julian Barbour)의 플라토니아(Platonia)를 떠올리게 한다는 거다. 줄리안 바버의 주장은, 마치 다중 우주가 존재하듯 수많은 플라토니아가 무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 로벨리가 주장하는 것은 기존 물리학이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 시간의 흐름, 즉 시간의 화살이란 열역학적 현상이며 통계적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뻔한 이야기를 동화적 톤으로 듣기 위해 이 책을 집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게다가 시간이란 개념이 결국 비트겐슈타인 식의 '이름 짓기 오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이 위대한 과학자가 '카테고리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시간이라 말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방정식의 t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화살, 즉 시간의 흐름을 지칭한다. 생명체로서 우리가 지각하고 기대어 사는 그것 말이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서, 그것이 방정식의 매개변수로 쓰이는 t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오도다. 호랑이를 무찌르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호랑이 그림을 찢어버리는 행위와 뭐가 다른가.



그래도 로벨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래도, 루프양자중력 이론을 살펴보자. 어려운 개념을 수학 없이 설명하는 능력에 있어서 탁월한 로벨리지만, 이 책은 그의 모든 책들 중에서도 이해하기가 단연코 쉽다.


현대 물리학의 두 이론은 서로 만날 일이 별로 없다. 거시 차원은 일반상대성 이론으로, 미시 차원은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 두 개의 차원이 만나는 경우다. 블랙홀과 빅뱅 시점의 우주가 바로 그런 희귀한 경우다. 이때 생기는 모순을 해결하려고 나오는 이론들이 (초)끈이론, 루프양자중력 이론 등 소위 TOE(후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루프양자중력 이론은 만물을 이루는 기본 구성 단위가 중력장 루프라 생각한다. 반면, 초끈이론은 이것이 끈(string) 내지 막(membrane)이라 생각한다. 그게 그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끈과 루프는 분명 닮은 구석이 있지만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끈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작은 선 형태의 입자이지만, 루프는 공간 그 자체, 즉 중력장이기 때문이다. (190쪽)


나는 이게 궤변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일단 로벨리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초끈이론은 만물을 입자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반면, 루프이론은 만물을 공간 '양자'의 집합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보면, 초끈이론은 만물을 물질 차원에서 설명하는 반면, 루프이론은 (시)공간 차원에서 다룬다. 


그런데 이건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일단 로벨리를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나서 반박해 버렸다. 어쨌든 이 말은 해야겠다. 에너지와 물질이 다르지 않은데 입자와 (시)공간이 다르다는 얘기는 그냥 억지다. 내 생각에 로벨리의 저 말은 그냥 저 표현이 대중의 이해 수준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초끈이론과 루프이론의 진정한 차이점은 수학적 전개에 있다. 물론 나는 그 전개의 구체적인 것을 모른다. 그러나 결론은 알고 있다. 우선 제일 중요한 차이는 이거다. 현재 초끈이론을 성립시키는 방정식의 해는 10^50개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걸 과연 방정식의 해라 부를 수 있을까? 반면, 로벨리에 따르면 루프이론의 수학적 해는 꽤 구체적으로 정해진다.


이 차이에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의 차이가 발생한다. 루프이론에 따른 수학적 계산에 따르면, 빅뱅 이전에도 우주는 존재했으며, 심지어 수축 중이었다. 즉, 루프이론에 따른 우주는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반면, 전통적 빅뱅 이론에 따르면 빅뱅 이전의 시간에 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스티븐 호킹이 여러 권의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둣, 이 질문은 남극에서 더 남쪽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과 같다.


특이점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빅뱅과 유사한 상황, 즉 블랙홀에 대해서도 차이가 그대로 이어진다. 루프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은 완전한 특이점이 아니다. 루프이론에 따르면, 공간 역시 물질과 마찬가지로 최소 단위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 양자 크기의 공간, 정확히 말하면 플랑크 길이를 가지는 부피가 최소 단위다. 블랙홀 역시 무한히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이 크기까지만 축소된다. 그래서 소위 '플랑크 별'이 된다. 


이는 거대 질량 천체의 붕괴가 중성자 수준의 척력을 이기지 못하고 멈추는 현상, 즉 중성자 별의 형성과 같은 원리다. 플랑크 크기 이하라는 건 없으므로, 그 밀도 이상으로 축소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척력에 의해 플랑크 별은 다시 팽창하기 시작한다. 수축에 이은 팽창, 그것은 마치 빅뱅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블랙홀의 폭발을 관측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이다.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반상대성 이론이 끼어든다. 중력이 무한대에 가까운 플랑크 별의 입장에서 수축이나 폭발과 같은 현상은 평소의 시간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그에 비해 중력이 너무나 작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그 시간은 한없이 늘어진다. 그래서 마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초끈이론의 문제점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다. 로벨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초끈이론 지지자들이 이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믿는다.


끈이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10차원 공간과 초대칭적 입자들이 필요하다. 때문에 이 이론은 아직 강한 추측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험을 통한 최소한의 실제적인 확인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다. 사실 초대칭적이지도 않고 차원도 고작 세 개뿐인 이 세상에 대해 적절하고 납득할 만한 일관된 예측을 이끌어내고자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초대칭 입자들로 이루어진 10차원 공간 이론을 사용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다. (192쪽)


일반상대성 이론이 말하듯, 시간과 공간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루프이론에서 말하는 공간 '양자'는 사실 시공간의 양자(알갱이)다. 따라서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중력장의 상호작용뿐이다. 세상엔 그 어떤 것도 없고 오직 상호작용만 존재한다고, 카를로 로벨리는 여러 권의 책에서 이미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 TOE의 후보로 종종 소개되는 루프이론을 카를로 로벨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현재 또는 머지않은 미래에 TOE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허황된 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61쪽)



그의 삶과 지혜


이 책에서 진정 빛나는 부분은 오히려 그의 자서전 아닐까. 카를로 로벨리는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자서전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다.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 자기 삶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기초 과학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현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연구비가 모자라 고생한 경험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 예컨대 진화론 교육 금지 같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캔자스의 시골마을부터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미국 내 여러 지역의 학교에서는 더 이상 진화론이 옳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문화상대주의라는 명목하에 진화론 교육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79쪽)


이런 놀라운 얘기도 한다.


세계 대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선생님들이 파시즘을 주장했고, 전후에도 대부분은 속으로 변함없이 파시즘을 따랐다. (10쪽)


문장의 앞단은 당연한 얘기지만 뒷부분은 상상하기 어렵다. 극우 정권이 속속 탄생하는 요즘 더욱 느끼는 것이지만,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세 나라에 대해서 국제 사회는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의 평생 동지이자 친구, 공동 연구자인 스몰린과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감동스럽다. 처음 공동 논문을 낼 당시, 스몰린은 아직 무명인 로벨리를 배려해 논문 내용의 일부를 먼저 단독으로 발표하라고 권한다. 누가 먼저 논문을 내는가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학계에서 이런 양보를 하려 하다니, 정말 대단한 인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로벨리는 감사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으면서, 미국의 문화, 그리고 최근의 우경화에 대해 우려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미국인이 말하는 사회정의는 누구라도 '능력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유럽에서 사회정의는 약자의 보호를 뜻한다. 그리고 또 놀라운 이야기.


나는 휴대폰에 미국의 무인정찰기가 어딘가에서 사람을 죽일 때마다 알려주는 앱을 깔았는데, 알림이 멈추지 않고 있다. (176쪽)


그러나 로벨리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의 올바른 과학관이다. 과학이란 언제나 반박을 향해 열려 있는 구조다. (그래서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아닌 것이다.) 그는 과학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나 또한 루프이론이 정말 완벽한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루프이론이 맞았는지, 즉 실제로 자연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이론인지도 알 수 없다. (189쪽)
이 모든 이론들이 아직은 사변적 이론에 머물러 있으며 나중에 완전히 틀린 주장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197쪽)


하나의 중요한 의미에서, 이 책은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이 책은 여전히 걸작이고, 나는 로벨리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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