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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22. 2023

자유도 건강도
끝없는 투쟁의 결과다

[책을 읽고] 대런 애쓰모글루, <좁은 회랑>

지적 유희로서 대단히 흥미로운 책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인간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듯이, 이 책은 성공적인 국가-사회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것은 국가와 시민 사회의 균형이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실현하는 것은 레드 퀸 효과, 즉 사회가 국가 및 정치적 엘리트와 겨루고 그들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444쪽)


저자는 이 틀을 이용해서 유럽과 중국이 왜 다른 길을 갔는지, 과테말라와 코스타리카와 왜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는지, 1차 대전 패배 후의 독일과 2차 대전 패배 후의 독일이 왜 전혀 달랐는지를 설명한다.


이런 분석의 한계는 명확하다. 하나의 틀을 가지고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일은 재미있지만, 틀릴 수밖에 없다. 인도와 남미가 왜 다른지를 설명하는 부분부터 무리수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이후에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 난무한다.


20년 전 내가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게 제출했던 기말 리포트가 생각난다. 나는 그 당시 2차 대전 후 한국 정치를 3개의 요인으로 설명했는데, 세 번째가 contigency였다. 이 책에 나오는 식으로 말하자면, <경로의존성> 정도 되겠다.


커밍스 교수는 내가 제시했던 두 개의 요인은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했지만, 3번째 요인 contingency가 너무 작위적이라 비판했다. 경로의존성이란 단어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국 아주 값싸고 간편한 서술에 불과하다. 어쩌다 그랬다는 얘기니까.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국가-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부분도 식상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들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하나의 틀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만도 욕심인데,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해결책까지 제시하려 하는 것은 과욕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5점 만점을 매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매우 재미있다. 사흘 동안 롤러코스터를 탄 듯 스릴 넘치는 지적 유희를 즐겼다. 그것만으로 대런 애쓰모글루, 그리고 리디셀렉트에 감사한다.



국가-사회의 균형은  필요한가


이 책의 주제는 자유다. (52쪽)


이게 문제다. 두꺼운 책을 읽으며 몰입하다 보니 이 책이 <잘 사는 나라>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인 줄 착각했다. 다시 보니, 책 초입에서 저자는 주제를 제시했다. 좁은 회랑에서만 이룰 수 있는 그것은 바로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다.


리바이어던, 즉 국가는 없어도 곤란하지만 너무 강해도 자유를 억압한다. 국가의 강력한 힘에 족쇄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시민 사회의 힘밖에 없다. 국가와 시민 사회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골디락스 영역은 매우 좁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좁은 회랑>이다.


위태롭지만 이 좁은 회랑을 걸어가는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 그리고 기타 지역에 소수 존재하는 소위 선진국들이다. (저자에 의하면, 한국도 포함된다.) 유럽은 게르만족의 시민 사회와 로마의 국가 체계를 결합하여 오랫동안 씨름한 결과 좁은 회랑에 들어섰다. 미국은 건국 초기에 다양한 이해 집단이 갈등 끝에 합의한 헌법의 힘으로 좁은 회랑에 이르렀다.


회랑 바깥에 대다수의 국가들이 있다. 국가가 너무 강력한 중국, 사실상 국가가 부재하는 아프리카, 남미, 중동의 많은 나라들, 시민 사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이상한 질서에 파묻힌 인도, 그리고 <종이 리바이어던>이라 불리는 허울뿐인 국가가 지배하는 남미는 이 좁은 회랑의 바깥쪽에 있다.


제자리에 머무르려면 전력으로 달려야 하는 <빨간 여왕>처럼, 시민 사회와 국가의 건전한 경쟁은 끝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열심히 달려야만 좁은 회랑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나름대로 <좁은 회랑>에 이르고 머무르는 해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목록은 마치 <건강 생활 가이드> 같은 느낌이다. 건강 역시 끝없이 계속되는 긴장 속의 균형이므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목록이 너무 뻔한 내용인 것은, 적어도 재미는 없다.


다만, 딱 하나 기억할 만한 조언이 있다. 바로 선거구 재획정이다. 미국의 경우 양대 정당 후보 중 하나가 안전하게 당선되는 소위 <나와바리>가 수십 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 이상일 텐데?) 선거구 재획정은 게리맨더러들이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해체적인 선거구 재획정은 매우 창조적인 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그 좁은 회랑에 이르게 된 일은 순전히 우연 아닐까? 내가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게 내밀었던 세 번째 요인, contingency와 똑같이 들리는 이유는 뭘까? 내가 보기에 이 책이 실패한 지점은 바로 그 <좁은 회랑>에 이르고 머무르는 공식에 설득력을 부여하지 못한 것이다.


앤설 키스가 소위 <7개국 연구>에서 했듯,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만 보고서에 올리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이 책 또한 같다. <좁은 회랑>의 공식을 너무 많은 사례에 적용하는 바람에 설득력을 잃은 부분이 있는 반면, 명백히 자유와 번영을 누린 문명들이 분석 대상에서 빠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공화정 과 5현제 시대의 로마다. 저자는 유럽의 <좁은 회랑>이 게르만족의 상향식 의사 결정 전통과 로마의 국가 체계의 결합이라 설명하고 있지만, <좁은 회랑>은 고대 그리스는 물론 고대 로마에서도 완성되어 있었다. 중국 문명이 언제나 <좁은 회랑>의 바깥에 있었다는 지적에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작품 제목: 균형. 작가: AI.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이 책과 <사피엔스>의 첫 번째 공통점은 둘 다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두꺼운 책이라는 점이지만,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간단한 명제와 명료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책의 나머지 부분이 술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이다. 나는 <사피엔스>를 읽는 데 만 하루가 걸리지 않았고, 이 책 역시 만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재미에 몰입해 멈추지 않고 읽게 되는 책이다.


이탈리와 도시에는 높은 첨탑이 많다. 왜 그럴까? 권력자 후보자들, 즉 엘리트 가문들이 서로를 견제하느라 그런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이탈리아인 게 다 이유가 있다.


또띠야를 발명케 한 것은 시민 사회의 힘이었다. 옥수수를 통채로 운반하는 것은 계단식 농경지에서 너무 힘든 일이었다. 옥수수를 또띠야로 가공하여 운송하는 좀더 효율적인 방법이 나타난 것은 시민 사회의 힘이었다. 독재 국가였다면 그냥 노예 노동을 강요하면 그만이었다.


중국은 국가 권력이 시민 사회를 압도한 사회였지만 그렇다고 국가 권력이 제대로 작동했다고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청나라는 강희제의 인두세 동결 이후로 세수 부족에 시달렸고, 운하 관리를 비롯한 공공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할 수 없었다. 이것이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시민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허울뿐인 국가, 즉 <종이 리바이어던>이 널리 존재하는 현상이 현재의 평화 때문이라는 해석도 재미있다. 전쟁이 흔한 국제 체제였다면, 이런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축출되었을 것이다. 만연한 평화로 인해 껍데기뿐인 국가도 국가로 인정된다. 그래서 무가베가 WHO 홍보대사로 임명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의외의 수확


책을 읽다가 주제와 다소 동떨어진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이름만 알던 이븐 할둔에 대해 배웠다. 14세기를 살았던 할둔은 <역사 서설>이라는 책을 통해 문명의 흥망에 관한 공식을 제안했다.


정주 세력과 유목 세력 간의 갈등이 문명의 기초를 이룬다. 이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은 언제나 유목 세력이다. 승리하여 정주 세력의 영역을 확보한 유목 세력은 세대를 거치며 정주 세력이 되어가고, 약해진다. 이는 다시 나타나는 유목 세력에 의해 밀려난다. 승리한 유목 세력이 약해지는 데는 3대가 걸리고, 하나의 왕조는 대략 120년 정도 존속한다.


유목 세력이 정주 후에 약해지는 메커니즘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으로 설명한다. 승리한 유목 세력은 원래 가지고 있던 중용과 절제를 잃어간다. 지배자가 된 유목 세력은 욕심에 눈이 멀어 세율을 올리고, 이는 노동 의욕을 꺾어 세수를 오히려 감소시킨다. (이 부분에서 이븐 할둔은 14세기에 이미 래퍼 곡선을 이해했다.) 


결국 각종 세금이 백성들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그들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고... 그러면서 (백성들) 대다수가 경작활동을 꺼리게 된다. 그 결과 세수 총액은 줄어든다. (이븐 할둔, <역사 서설>. <좁은 회랑> 355쪽에서 재인용)


탁월한 통찰이다. 근대 이전에 찬란한 학문이 꽃 피운 것으로 대개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를 든다. 우리가 통상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에는, 분명 아랍 세계가 그 꽃을 피웠다.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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