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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04. 2018

이야기속 아이에게 동화는 현실일 뿐이다

[기억하기] 오기와라 히로시의 단편,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

동화는 천진난만해 보이는 초등학교 3학년 소녀, 아카네의 가출로 시작한다. 들판에는 벼가 푸르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참고로 말하는데, 벼는 쌀이 되는 풀을 말한다. (192쪽)


아카네는 사촌에게 영어를 배우는 중이다. 하늘은 스카이. 하늘색은 블루. '엄마'는 매일 잔소리다. '마미'라면 그렇지 않을 텐데. 마미라면 표고버섯 먹으라는 잔소리 대신 애플 파이를 먹으라고 할 거다.

바보 같은 엄마는 생활을 하려면 일자리라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얹혀 사는 아줌마에게 매일 굽신거린다. 라이프는 이렇지 않을 텐데, 생활이니까 이런 거다. 개미는 앤트. 아줌마도 앤트.

가방에는 먹을 과자는 물론 게임기와 잡지책도 가져왔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신사 근처에서 봉투를 뒤집어 쓴 더 작은 꼬마를 만났다. 이름은 모리시마. 모리는 숲, 그러니까 포레스트. 아카네는 꼬마를 포레스트라 부르며 함께 돌아다닌다. 아침을 안 먹었다는 포레스트에게 아카네는 과자를 내민다. 포레스트는 밀가루 알러지가 있다고 한다. 그럼 포테이토 칩은 괜찮지? 포레스트는 과자 한 봉지를 가루까지 전부 먹어치운다. 한참 동안 뭘 먹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바닷가에 도착해 시간을 보내던 두 아이는 조개를 캐던 한 남자를 만난다. 큰 남자니까 빅 맨. 잘 곳은 있냐는 말에 잠잠한 두 아이를 재워주겠다고, 따라오라고 하는 빅 맨.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되지만, 포레스트와 둘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고 따라간다. 엄마와 둘이 사는 방 만한 공간에 지붕만 얹은 초라한 집. 쾨쾨한 냄새가 난다. 라면이라도 끓여주겠다는 빅 맨의 말에, 포레스트는 밀가루 알러지가 있다고 한다. 빅 맨은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는 집 안을 구석구석 뒤져, 쌀국수를 꺼낸다. 냄비에 콜라병에 든 물을 붓고, 빅 맨은 잠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다. 손에는 파와 시든 채소가 들려 있다.


"훔쳐 온 거 아니다. 내 밭이 있어."
그렇게 얼른 말하고 파와 채소를 가위로 잘라 냄비에 넣었다. 쌀국수라는 것도 넣는다. 아까 캐 온 조개도 던져 넣었다. (231쪽)


왠지 정겹다. 혼자 사는 남자답게, 채소를 가위로 잘라 넣는다. 바닷가에서 캐와 물속에 던져 두었던 조개도 넣는다. 냄비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빈 컵라면 용기에 쌀국수를 받아 든다. 식구란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하지 않나. 오늘 처음 만난 세 사람이 지금은 식구다.

늘상 그러는 것처럼 찾아온 들고양이. 빅 맨은 고양이 사료를 반찬통에 덜어 준다. 얼룩 고양이 못지 않게 아카네도 허겁지겁,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먹는다. 포레스트는 얼른 한 그릇을 비우고 쌀국수를 더 받는다. 빅 맨은 열두 살이라는 포레스트에게 왜 그리 작냐고 하면서, 내일은 우유를 사다 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빅 맨은 쌀국수 대신 술을 마신다.


빅 맨은 쌀국수는 먹지 않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주다. 아빠가 늘 마셨던 술과 똑같은 냄새가 나서 금방 알았다. 싼 값에 취할 수 있는 술.
더는 먹지 못하고 아카네의 몸이 굳었다. 이렇게 술을 마시다 아빠처럼 변신해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혼자 화를 버럭버럭 내지는 않을까 해서. (233쪽)


다행히 빅 맨은 변신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빨개졌을 뿐. 그러고는 수염이 오글오글한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내가 이렇게 살고는 있지만, 시의 복지 관계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내가 전화를 걸어봐야 그러니까, 연락처를 가르쳐주마. 다음에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전화해. 열두 살이니까 제 손으로 전화 걸 수 있겠지. 알겠냐?" (234쪽)


아까 어둠 속에서 아이들과 실랑이를 할 때, 빅 맨은 포레스트의 등을 본 것이다. 포레스트가 아카네를 만나서 처음으로 비닐봉투를 벗었을 때, 한쪽 눈에는 펀치 자국이 있었다. 고양이도 자기 자식은 애지중지 키우는데, 믿을 수가 없다면서, 빅 맨은 소주를 들이키다 포레스트의 손바닥에 전화번호를 써 준다.

빅 맨의 집에서 냄새 나는 담요를 덮고 자던 아카네가 밤중에 눈을 뜬다. 담요에서 밖으로 나오니 별은 보이지 않고 동그란 달이 떠 있다. 아카네의 하룻동안의 방황이, 행복한 결말로 맺어질 것만 같은 밤이다.

© Pixabay
아카네는 신발을 신고 해변으로 걸어갔다.
달빛 아래, 바다에 달빛의 가느다란 띠가 떠 있었다. 마치 한 줄기 길처럼.
상상 속에서 아카네는, 그 빛의 길을 걸었다. 신발을 벗을 필요는 없다.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빛의 길은 따뜻하고, 푹신푹신 부드러웠다.
그래, 내일은 또 새로운 길을 걸어봐야지. 좀 더 멀리 가보자. 지금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235쪽)


아침에 아카네는 큰 소리에 깬다. 두 명의 경찰이 빅 맨의 팔을 뒤로 꺾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제 괜찮다고 말하면서. 빅 맨이 오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는다. 공무집행 방해죄까지 더해야 말을 듣겠느냐고 빅 맨을 다그친다. 그렇게 크게 보이던 빅 맨은 경찰보다 작다. 다친 데 없냐고 하면서 경찰은 아카네에게 다가온다.


경찰이 아카네를 안아 올리려고 했다. 가슴 앞에 두 손을 엑스자로 모으고 그 손을 피했다. 경찰을 향해 외쳤다.
"아니야."
포레스트도 외쳤다.
"아니라고. 그만해."
나쁜 사람 아니야. 우리를 재워 주었어. 포레스트는 집에 가면 안돼. (237쪽)


빅 맨은 외친다. 아이 등을 보라고. 단속할 사람을 잘못 짚었다고. 포레스트는 망가진 인형처럼 고개를 젓는다. 아카네는 부들부들 떠는 포레스트의 손을 잡는다. 빅 맨이 손 바닥에 써준 전화번호가 지워지지 않게 살며시.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네모나게 벌리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 아니예요. 우리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카네의 마음은 걱정이 돼서 이렇게 슬픈데, 화가 나는데, 참을 수가 없는데, 오늘도 하늘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스카이. 바다는 바보 같이 블루. (238쪽)


가슴이 아프다. 간밤에 본 달은 그렇게 동그랗고, 바다에 뿌려진 빛의 길은 폭신폭신 부드러웠는데. 아침에 보이는 바다는 푸른 거울로 변신해서 하늘빛을 반사하고 있다. 어제 일은 다 잊었다는 표정으로.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것은 세상이 보는 그들의 모습이다. 빅 맨, 포레스트, 아카네가 아니라 거렁뱅이, 장애아, 그리고 가출 아동이다.


사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는 저녁때가 되면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고, 여기 있다.
그 사실에 아카네는 흥분했다. (235쪽)


어젯밤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빅 맨은 나쁜 사람 아니라는 말에도 경찰은 뒤로 묶은 빅 맨의 팔을 풀어주지 않는다. 열 살 아카네.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상은 내 목소리 따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까.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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