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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30. 2023

자본주의가 멸망하기 전에
농사를 시작하세

[책을 읽고] 세키 히로노, <글로벌리즘의 종언> (1)

한 시대가 끝나 간다느니, 현 체제가 이대로 지속될 수는 없다느니 하는 서사는 흔하다. 예전부터 그랬다. 10세기 사람들은 AD 천 년의 도래와 함께 세상의 종말,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올 거라 생각했다. 20세기 말에도 그랬다. 천 년이든 2천 년이든, 일단 밀레니엄이 끝나가는 분위기, 숫자 9 세 개가 나란히 늘어서는 분위기는 세상 끝나는 느낌을 주기에 딱 좋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끝장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1300년대 사람들도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예수 탄생이 아니라 313년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세면 1300년대 초반에 천 년이 도래한다는 셈법이다. 이렇게 꼬일대로 꼬인 계산법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세상의 종말을 상상할까? 그럴듯한 대답은 일본 애니메이션, <도쿄 매그니튜드 8.0>에서 볼 수 있다. 중간 고사를 망친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따위 세상, 망해버려라. 그랬더니 정말 진도 8.0의 대지진이 일어나버린다.



이 책을 쓴 세키 히로노 역시 한 시대의 종말을 본다. 그것은 자유무역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자본주의다. 도하 라운드가 좌초되고, TPP 구상이 헛돌고, 결정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한다. 이쯤 되면 자본주의, 적어도 자유무역의 종말이 왔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걸 바래왔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도 머리로는 자유무역을 반대한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랬다.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의 생활 수준이 더 나아진다니? 한 나라 안에서도 빈부격차를 줄이지 못하는데, 전 지구적 규모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이건 페이스북(메타버스 돌풍이 사그라들 때에 맞추어 <메타>라는 이름으로 변경한 그 웃기는 회사)이 사회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말 만큼이나 기막힌 반어법 아닌가?


다만, 나는 소비자다. 자유무역이 아니었다면 아스파라거스나 체리는 구경도 못 했을 거다. 요즘은 잘 꺼내지도 않는 보드게임이라는 이름의 예쁜 쓰레기도 훨씬 비쌌겠지. 아니, 내가 쓰는 모든 것들이 훨씬 비쌌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자유무역으로 이익을 보는 쪽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역이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방법은 무역과 석유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량이 급격히 늘었다. 산업혁명의 허들을 처음 넘은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시장을 찾았다. 제국주의의 시대다. 이건 칼 마르크스가 이미 했던 이야기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끝을 맞이하고 나서, 세상은 마르크스의 예연과 다르게 흘러갔다.


첫째, 노동자가 국경을 넘어 연합하지 않았다. 제국주의가 끝을 향해 달리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노동자들은 국경을 넘어 연대하기는커녕 각자의 국기를 들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둘째, 노동자가 들고 일어서지 않았다. 삶이 그럭저럭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무역 때문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TV와 냉장고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토록 저렴한 가격에 시장에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유 무역이 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GATT와 IMF를 만들었고, 자유 무역을 통한 시장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그것은 사실상 제국주의였다. 영국은 총칼로 세계를 착취했고, 미국은 자유 무역으로 착취했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새로울 것 없는 주장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미국이 적자를 봐야 돌아가는 전 세계 규모의 자유 무역이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배경에 저가의 석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한다. 유가가 배럴 당 200달러를 넘어가면 현재의 수송 체계가 무너지고, 그래서 자유 무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00달러라면, 어떤 200달러인가? 책을 쓴 2010년대 중반 가격으로 200달러인가? 저자가 명목가격과 실질가격도 구분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자는 그냥 200이라는 굉장히 임의적인 숫자만 제기할 뿐이다. 오일 피크, 즉 석유 고갈로 유가가 올라갈 것이고, 배럴 당 200달러를 넘기면 끝장이라는 단순한 도식만 제시하기를 반복한다.


석유 고갈이라는 단어는 이제 쓰이지도 않는다. 만화 <아즈망가 대왕>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선생이 학생에게 말한다. 너, 석유가 이제 50년 정도 쓸 양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 들어봤지? 네. 나 어릴 때도 그랬어. 그러니까 걱정 말어.


게임 <갤럭틱 시빌라이제이션>에는 심부채광(deep core mining)이라는 기술이 나온다.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므로 꼭 개발해야 하는 기술이다. 말 그대로, 지각을 넘어 맨틀, 내지는 외핵까지 뚫고 들어가 광물을 캐오겠다는 기술이다. 미래에 어떤 기술이 개발될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술은 거의 확실하게 개발될 것이다. 질적 변화가 아니라 양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석유가 고갈되지 않는 이유도 같다. (셰일 가스 개발이 질적 혁신인지 양적 혁신인지에 관한 토론은 사양한다.)


갤럭틱 시빌라이제이션 3


농업만이 해답이다


이 책의 재미있는 주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글로벌리즘의 종말 이후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그것은 '농'이다. 농업이란 '농'을 산업, 즉 한갓 돈벌이의 한 종류로 낮춰 부르는 이름이니, '농'이라는 말을 쓰자고 저자는 제안한다. (일본사회에서는 이미 쓰이고 있는 모양이다.) '농'이란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의 한 종류가 아니라, 농촌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형태다.


일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를 보자. 갑자기 일본 전역에 정전이 발생한다. 도시 기능이 마비된다. 주인공 가족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있는 시골로 가겠다고 길을 나선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들은 시골에 도착한다. 그리고 정말로, 시골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전기가 없어 조금은 불편하지만, 식수도 먹을 것도 충분했다.


과연, 문명이 무너져도 시골은 살아남을까?


서바이벌 패밀리


문명이 무너진 상황에 시골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이 책의 저자만이 아니다. 딜런 에번스는 <유토피아 실험>에서 실제로 그런 실험을 해본 경험을 서술한다. 그 책 초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문명이 무너지고, 도시 사람들이 시골로 몰려오면, 시골 사람들은 그들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배척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너무 아포칼립스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 이 문장은 중요한 전제를 깔고 있다. 하나, 문명이 무너지면 도시는 무너지겠지만 시골은 그렇지 않다. 둘, 도시 사람도 시골 사람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한다. 즉, 도시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고 싶어하고, 시골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포칼립스 문학이라는 건 이미 장르로 자리 잡았고, 넷플릭스는 거의 매달 아포칼립스 영화와 드라마를 찍어낸다. 아포칼립스 상태에서 주인공 그룹이 살아가는 방식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시설>에서 살아가든지, 유랑하든지. <시설>이 공동체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시설>은 대개 <폴아웃> 시리즈의 쉘터 같은 형태다. 공동체라기보다는 수용소에 가까우며, 그 자체로 영속하는 것보다는 어느 시점까지 살아남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동면 같은 것이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살아남기라는 재미있는 주제에 대한 가장 명석한 통찰은 <유토피아 실험>의 끝부분에 나오는 한 마디다. 유아론적 망상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이 멸망해도 누군가는 살아남을 것이다. 79억 인류가 하나도 남지 않고 전멸하려면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든가 지구가 태양계에서 튕겨 나가든가 하는 수준의 우주적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아니면 크툴루가 오거나.) 공룡을 멸망시킨 규모의 운석 충돌이 일어나도, 인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소규모의 인원이 살아남아 종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다소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로빈슨 크루소는 섬 곳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식물을 재배해 즐겼으며, 나중에는 노예까지 확보한다. <로빈슨 크루소>가 출판되고 나서 온갖 아류작이 넘쳐났던 것만 봐도, 사람들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삶을 공상하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공상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을 쟁취하는 상황을 공상한다. 그 와중에 로빈슨 크루소 식의 서사는 단 하나의 인물, 즉 <나>만을 가정하므로, 접근성도 좋다. 사회라는 복잡한 맥락 없이, 그냥 나라는 한 사람의 필요만 생각하면 되니 이 아니 즐거운가.


저자는 에도 시대의 일본을 찬양한다. 자본주의보다는 에도 시대와 같은 공동체적 삶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에도 시대에도 상업은 있었지만, 국제 무역은 아니었다. 그런 규모의 교역이라면 괜찮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심지어 이슬람권의 동서양 중개무역까지도 괜찮다고 한다.


현대 무역이 공급에 의해 주도된다는 사실, 즉 일단 팔 것을 만들고 나서 시장을 확보하는 순서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수요를 예측하기 때문이며, 수요를 예측하는 이유는 경쟁 때문이다. 쿠팡에서 주문한 물건이 다음날 새벽 문앞으로 배달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주문하기도 전에 그 물건이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물류 센터로 와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드 시대에는 공급이 수요를 견인한 것이 맞다. 일단 만들고 나서 팔 곳을 찾았다. 그러나 토요타가 적시생산(JIT)을 도입한 것이 이미 수십 년 전이다. 높은 경쟁으로 인해 마진율이 낮아진 지금의 시장에서, 무턱대고 생산하는 것은 파산을 향해 돌진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전 국민이 겸업 농가가 되어 부업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해답이다. 게다가 모범적인 선례로 러시아의 '다차(dacha)'를 든다. 다차는 텃밭 내지 주말 농장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다차는 1년 내내 쓰는 별장(year-round second home)이라고 하는데, 일단 저자의 주장대로 따져보자. 농사 부업이 과연 해답일까?



북한에서 텃밭이 성공했던 이유는 그것이 사유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망하고 다차가 잘 나갔던 이유는 그야말로 소련이 망해서다. 저자가 농사에 대해 가진 애착은 존중하지만, 한참 좋은 논리로 이야기하다가 이런 침소봉대식의 결론은 좀 곤란하다.


결론이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이 책의 진가는 거기에 있다. 그 주장들에 대해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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