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n 27. 2023

정당과 언론

[책을 읽고] 얀-베르너 뮐러, <민주주의 공부> (3)



대의제가 필요한가


루소는 유권자가 오직 선거 때만 자유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고 말했다. 저자는 루소의 말이 맞다면, 대의제는 악한 제도일 것이라 말한다.


대의는 부자유일 뿐 아니라 근본적인 불평등이기 떄문이다. 투표하는 유권자는 실제 통치 행위를 하는 대표자와 결코 대등한 존재일 수 없다. (95쪽)


그러나 저자는 대의제를 옹호한다. 대의제는 결국 일종의 분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유권자들이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당한 지적이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 때문에 전문직으로서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민 참여형 재판, 즉 배심원제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배심원으로 참가하는 국민들은 생업을 포기한 데 대한 금전적 대가를 받으며, 평결을 내리기 전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제비뽑기 민주주의에도 똑같은 장치를 만들 수 있다. 공직을 지키는 동안 생계비를 지원받고, 정치적 결정에 있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모든 정치적 결정을 투표로 결정하자는 말도 아니다. 스위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 국민투표를 진행하면 된다. 국민투표 헌법 규정은 사실상 죽은 규정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다. 


브렉시트의 문제는, 그것이 우매한 대중의 결정이었다는 점이 아니라, 고치기에 너무 어려운 결정이라는 점이다. 직접 민주주의였다면, 사정 변경에 따른 재투표가 가능했을 것이고, 애초에 그런 이상한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국민투표였기 때문에 거짓말과 포퓰리즘이 난립한 것이다. 국민투표가 일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훨씬 더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라는 체제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 집권당에 반대하는 세력, 소위 '충실한 반대파'가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대의제의 필요성에 이어붙이는 것은 아전인수다. '충실한 반대파'가 정당의 형태일 필요는커녕, 그 목소리가 하나 내지 소수의 거대 서사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에는 당연히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제 자체가 부정되는 사태를 막을 수 없는 경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치라는 역사적 사례가 있으므로 당연하다. 이 상황에서 저자가 처방으로 내미는 것은 시민 불복종이다. 그런데 이걸 처방이라 할 수 있을까? 시민 불복종은 혁명,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민란을 의미한다. 못 살겠어서 일어나는 것이지, 무슨 목표나 사명의식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원숭이 무리에서도 반란은 일어난다.



민주주의의 인프라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138쪽)


확실히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의 척도로 활용 가능한 지표다. 국경 없는 기자회와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각각 발표하는 세계 언론자유지수(Press Freedom Index)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부정확한 체성분 분석 결과와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 즉, 절대 점수를 보는 대신 추이를 보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어떤 경향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어떤 상태인지를 진단하기에는 부족하다.


언론이라는 게임은 SNS의 등장으로 매우 복잡해졌다. 트럼프의 경우, 언론을 통한 발표보다 트위터에 글을 남기는 방식을 선호했다. '아랍의 봄'을 가져왔던 SNS가 정반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언론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으며, 역사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저자가 지적하듯, 과거에는 지금보다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언론사가 많았다. 그런 시절을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을 보면, 언론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요즘의 경향이며,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언론 산업도 그런 방향성을 중시하는 것이 아닌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그럼에도, 조중동과 한경오라는 약어는 흔히 쓰인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명한 언론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그 언론이 어느 쪽인지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다만, 너무 지나친 편향성을 스스로 경계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편파적 언론은 나쁜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는 언론이 나쁠 뿐이다.


다음은 정당을 살펴보자. 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면, 정당이 민주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정당은 문제될 수 있다. 예컨대 1인 정당이 그렇다. 네덜란드에는 헤이르트 발더르스라는 사람과 그가 만든 법인, 이렇게 딱 당원이 2명뿐인 (그러나 실제로는 1명뿐인) 정당이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당은 법적으로 유한책임회사이고, 임원은 4명뿐이고 나이절 페라지 1명이 사실상 통제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런 당의 존재 이유가 여론 조작임은 굳이 연구를 해보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당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대규모로 유입된 신규 당원이 당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법적 테두리 안에서는 어떤 목표라도 허용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들이다. 후자의 질문에는 곧바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막지 못했던 나치당이 떠오른다. 본질적 민주주의 또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문제다.


인프라 관련, 저자의 핵심 주장은 언론도 정당도 진입 장벽이 낮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사 설립이 어려운 우리나라에 비해 언론사 설립에 거의 제한이 없는 미국의 언론 환경이 나은 것을 보면,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내 생각에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것보다는 진흙탕 싸움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의 양상이 변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