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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28. 2023

돈으로 망한 정치, 돈으로 구하라

[책을 읽고] 얀-베르너 뮐러, <민주주의 공부> (4)

그렇다면 해결책은?


저자의 해결책은 결국 인프라를 손보는 데 있다. 키워드는 접근성, 정확성, 독립성, 그리고 시민에 의한 외부 평가다.


우선 접근성을 살펴보자. 접근성에는 두 가지 측면, 즉 정당 설립과 개인의 정당 가입이 있다. 접근성은 양쪽 모두 매우 높아야 한다. 즉, 진입 장벽이 낮아야 한다.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 발생하는 평형 상태를 생각해보면, 이 처방은 맞는 것 같다. 미국에는 오바마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언론도 있지만, 이런 잡음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의 부작용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장난 정당이나 장난 언론을 못 알아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도 더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기술 진보 때문이다. 트위터의 가짜 아이디를 추적하는 것은 일반인 수준에서 대단히 어렵다. 딥페이크 기술은 너무 흔해 빠져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지만, 언제 어떻게 가짜 이슈를 터뜨릴지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돈이다. 정당도 언론도 돈이 필요하다. 부유층에게 이 게임이 유리한 이유다. 이에 대해 저자는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한다. 저자가 생각해낸 것은 아니고, 프랑스 경제학자 줄리아 카제(Julia Cage)등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이다. 바로 정치후원금 바우처 제도다.


모든 개인에게 일정 금액의 바우처를 제공하고, 정치 후원금은 오직 이 바우처로만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정치 기부와 기업 후원금이 불법화되는 것이다. 정당 설립의 경우에도, 일정 액수 이상의 후원금을 진입 조건으로 정한다. 사용되지 않은 바우처는 지난 선거 결과에 따라 배분된다.


앞서 제시된 네 가지 기준 중 세 가지, 즉 접근성, 독립성, 그리고 시민 평가를 모두 해결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사실상 금권정으로 변해 버린 현대의 <민주주의>를 시민들의 손에 다시 돌려줄 수 있다.


그러니까, 돈 투표다


나는 이 아이디어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대폭 더하면 더 좋은 제도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사용되지 않은 바우처 액수를 배분할 때, 지난 선거 결과 대신 당장 전자투표를 실시하는 것이다. 저자도 여론조사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만큼, 직접 민주주의가 개입할 여지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다.


언론의 경우에도 바우처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 정당과 언론은 민주주의의 인프라로서 그 본질적 기능이 같다. 즉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매개기구다. 따라서 다른 해결책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저자는 "모종의 작전에 의해 시민들의 바우처가 민영 매체로 몰리면서 BBC처럼 권위 있는 공영 기구가 자금 부족에 시달릴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는데, 이건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BBC가 뭔가 잘못한 것이다. 시민들의 집단 지성을 우습게 생각하지 말자.


저자는 바우처 제도에 이어, "추첨제"를 진지하게 제안한다.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에게 여러 가지 절차적 개혁안을 보여준 후에, 유권자 전체를 대상으로 권고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224쪽)


앞서 말했던 고대 그리스의 추첨제, 즉 로또크라시(lottocracy)다. 미국 오리건주에서는 실제로 이 제도가 <시민 검토단>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다. 배심원 제도와 근본적으로 같은 제도이니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이들은 평균 임금 수준의 급여를 수령하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다.



소결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지만, 이 둘은 균형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 중용은 언제나 어렵다. 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이론이 예측했고, 또 지난 세기까지는 대충 맞아떨어졌던 현상은 모든 정당이 서로 어중간하게 비슷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21세기에 들어 바뀌었다. 난 그 시점이 바로 9/11 사건이라 생각한다. 소련의 몰락으로 적을 잃은 미국이 새로운 적을 찾아낸 것이다.


금권정도 정치 혐오의 문제도 늘 있어 왔지만, 혐오 정치 세력의 원내 진입은 새로운 현상이다.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로 이 현상은 정점을 찍었다. 가운데로 모이는 대신 양 극단으로 갈려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정치 현상은 지금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체계다. 나치의 등장이 역사적 선례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다시 꿈틀대고 있다. 나는 나치의 정권 장악이 선동의 결과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혐오 정치 역시 선동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동의 주체는 다름 아닌 정당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이 많은 정당이다. 한층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이 많은 누군가에게 많은 기부를 받은 정당이다. 요약하면, 금권정이 혐오 정치를 부추긴다.


저자가 소개한 후원금 바우처와 로또크라시는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후원금 바우처의 핵심은, 바로 그 바우처가 아니고서는 정치 자금을 확보할 수 없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현직 정치인들은 이 제도를 도입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 아니다. 돈은 누구나 좋아한다.)


바우처를 제외한 정치 헌금의 배제는 지구 상 어디에서도 채택하고 있지 않지만, 로또크라시는 바로 미국의 한 주에서 시험적으로 운행 중이다. 희망을 가져볼 만하다.


그러나 나는 에스토니아에서 더 큰 희망을 본다. 에스토니아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직접 민주주의를 시험하고 있다. 나는 직접 민주주의가 진정한 해결책이라 믿는다. 바우처도 로또크라시도 직접 민주주의를 향해 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가 성공 사례를 보여준다면, 별도의 보조 기구 없이도 직접 민주주의를 시도해 보는 나라들이 더 등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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