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참 많은 시험을 치르며 살아왔습니다. 하필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에서 살았던터라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부터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대학교 입학을 위한 수학능력시험, 로스쿨 입시를 위한 법학적성평가 그리고 변호사시험까지 굵직한 시험들을 보아왔고, 그사이에 보았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더하면, 이제까지 치룬 시험을 다 셀 수나 있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시험에 익숙한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문제가 나오면 풀어야 했고, 풀면 정답과 맞추어야 하는 그런 방식에 익숙한, 아니 그런 방식으로 훈련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변호사가 된 이후에는 운전면허 시험을 빼고 다시 제대로 된 시험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자격증이 욕심나기는 했지만, 본능적으로 시험을 피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전히 일상이 시험인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의 일상, 즉 판사와 검사, 의뢰인과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은 어찌 보면 시험과도 같습니다. 특히 재판이 시작되면 글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는데, 내세운 논리가, 심지어 작성한 글의 표현이 있는 그대로 담긴 판결문을 마주할 때,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마치 100점 만점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다소 변태스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매우 무더웠던 홍콩의 밤, 횡단보도 사진입니다. 물론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한 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지나가던 차에 밟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차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고, 2~3시간이 지난 후 아이는 엄마와 함께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출동한 경찰관은 아이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차량을 추적하였는데, 현장에 CCTV가 없었던 터라 추적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근 CCTV에서 인접한 시간대에 아이가 말한 차 색깔, 모양과 비슷하게 보이는 차량이 찍힌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경찰은 해당 차량을 추적하여 피의자로 특정하였습니다. 얼떨결에 경찰에 소환된 그 차량의 운전자는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이자 범죄자로 특정되었고, 결국 기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통사고는커녕 그 당시의 기억도 없는 그 운전자는 사무실로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사건을 수임하고 사건 기록을 검토하였습니다. 사건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고 주변 꽃집에서 화분을 사면서까지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조사하며 사실관계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사고 임은 맞지만, 아이의 불완전한 진술만을 토대로 섣부르게 용의자를 특정한 것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른바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한 라인업 절차를 어겼고, 결국 의뢰인이 교통사고 운전자가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진술에 따른 교통사고의 양태, 교통사고가 발생한 장소 및 그 주변상황의 특징, 피고인 차량의 제원, 아이의 보폭 등을 토대로, 의뢰인이 설령 위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라고 하더라도 운전자로서는 도저히 보행자의 진입을 예상하거나 이를 회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작은 단어, 표현 하나도 숙고하며 신중하게 법리관계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그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것도 주장한 사실관계와 법리를 모두 받아들여 주었고, 심지어 표현까지 그대로 차용하여 판결하였습니다. 정말이지 100점을 맞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매우 기쁩니다. 100점 맞은 시험지를 집으로 들고 가 부모님께 자랑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자랑해봅니다. 100점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