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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철 Jul 28. 2023

변론일기 #3 무죄판결과 여름복숭아

#3 충주 명예훼손 사건

#3 충주 명예훼손 사건 - 무죄판결과 여름복숭아


이제 막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신입 변호사가 지난 주부터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열정 가득한 신입 변호사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열정 넘쳤던 공익법무관 초임 시절이 떠오른다.      


군복무를 대체하기 위해 총 3년 동안 공익법무관으로 일하였는데, 첫 해에는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서 범죄피해자를 돕는 피해자 지원 업무를 하였고, 둘째 해부터는 법률구조공단에서 소송 등 구조 업무를 하였다. 공부하면서 살아있는 실제 사건을 직접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에, 일이 적은 곳보다는 좀 고돼도 많이 배울 수 있는 임지에 발령받기를 바랬다. 1년차 근무 중 받았던 소소한 포상 덕분인지, 2년차 임지로 1순위로 지망했던 법률구조공단 충주출장소에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사무실을 이전했지만, 당시 법률구조공단 충주출장소 사무실은 ‘무학시장’이라고 하는 전통시장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5일마다 장이 섰는데, 장날이 되면 사무실 앞 거리에는 반찬, 과일, 생선부터 묘목과 종자,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상일들이 가판을 깔았고,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엿장수는 늘 전자음이 가득 섞인 뽕짝 음악에 맞추어 가위 소리를 내며 흥을 돋웠고, 자신의 가판 앞에 늘 줄을 세우는 김 장수의 영업비밀은 들기름 냄새를 잔뜩 풍기며 김을 굽는 것이었다. 낯설지만 푸근한 풍경이었다. 뽕짝 음악에 맞추어 준비서면과 의견서를 써 내려가는 일도 금세 익숙해졌고, 나도 5일마다 김 가판대 앞에 줄을 서 김을 샀다.      


충주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법원에서 국선 변호를 맡아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명예훼손 사건이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러했다. 피고인은 충주에서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여성 목사였는데, 다른 교회의 장로(편의상 A 장로)에게 피해자가 금전 관계가 복잡하고 혼인하지 않은 채 여성과 동거하고 있다는 취지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었다. 피해자의 직업 역시 목사였다.   

   

어둠에 스며드는 빛 - 군위 사유원에서


공소장에서 글로 읽은 사건의 첫 인상은 ‘아니. 유죄가 맞는데?’였다. 목사인 피해자 입장에서는 실제로 이성과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와 관계없이, 그와 같은 소문이 퍼질 경우 목회활동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런 소문을 왜 퍼뜨렸는지 피고인의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의구심을 가지고,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기록을 읽어내려갔다. 기록에는 보다 자세한 상황이 나타나 있었다. 피해자는 교회를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는, 이른바 ‘부흥사’로 활동하는 목사였고, 피고인은 충주에서 조그마한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목사였다. 피고인과 피해자는 피고인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여는 문제를 논의하다가 일이 틀어져 부흥회를 열지 않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해 A 장로에게 피해자에 대해 험담하였다는 것이었다.      


충주 외곽에서 작은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여자 목사인 피고인, 교회를 돌아다니며 대규모 부흥회를 인도하는 남자 목사인 피해자. 이 둘의 역할과 성별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인 영향력과 역학관계를 굳이 따져보자면 열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험담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소장과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피고인에게 연락해 상담 일정을 잡았다. 사무실에 찾아온 피고인의 첫 인상은 ‘아니. 무죄같은데?’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피고인은 충주 외곽에서 전 교인이 열댓 명에 불과한 작은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교인들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들이었고 그 중에는 생활 형편이 매우 어려운 독거노인들도 여럿 있었다. 피고인은 담임목사로서 새벽기도와 수요 예배, 금요 철야 예배를 주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같이 교인들의 집을 돌며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주고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었다. 목회 활동이라기보다는 사회복지 활동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피고인이 남을 험담할 리가 있나!     


피고인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사건을 재구성해보았다. 피고인은 어느날 충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A 장로가 출석하는 교회였는데, A 장로 역시 그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 부흥회를 인도한 목사가 바로 피해자였다. 부흥회를 마친 후 피고인과 피해자를 모두 알고 있던 A 장로의 소개로 피고인은 피해자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피고인의 교회에서도 부흥회를 열어주겠다며 부흥회를 제안하였다. 피고인은 본인의 교회에 부흥회가 필요할지, 피해자의 생각이나 신앙관이 본인의 교인들에게 적절할 것인지 고민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피해자가 교인들과 여러 금전적인 문제가 있는 데다가, 그 금전적인 문제에는 피해자와 함께 사는 여성이 관련되어 있는데, 피해자와 그 여성은 부부관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피고인은 어느 모로 보나 피해자에게 교회의 부흥회를 맡기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A 장로에게 전화를 걸어 부흥회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잠시 후 A 장로는 다시 피고인에게 전화를 걸어와 부흥회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주저하는 피고인에게 A 장로는 대답을 재촉하였고, 피고인은 결국 A 장로에게 피해자에 대한 여러 좋지 않은 소문도 있고 신앙관도 달라 부흥회를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A 장로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피해자는 대노하며 피고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게 된 것이었다.     


사건의 전후 상황을 모두 듣고 나니, 피고인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험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공소장과 증거기록에 담기지 않은 숨겨진 사정들을 모두 고려할 때 피고인을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는 것은 분명히 부당한 일이었다. 법정에서 여러 사정들에 대해 잘 변론하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고, 반드시 무죄판결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고인에게 재판을 잘 준비해서 억울함을 호소해보자고 말하고 재판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A 장로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해보았다. 다행히도 A 장로는 피고인과 피해자 중 어느 한 편을 들 생각은 없어 보였고, 다만 자신이 무엇인가 말을 잘못 전달해 피고인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보였다. A 장로를 안심시키고 사건의 전후 경위에 대해 물었다. A 장로는 피고인이 전한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미 피해자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고, 피해자 역시 지역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에 잘 알고 있었고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사정을 말해주었다. 피고인이 부흥회를 여는 것을 거절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그 이유를 물어본 것도 피해자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재판이 시작되었고, 피고인이 무죄인 이유에 대해 변론했다. 그리고 A 장로와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A 장로에 대한 증인신문을 먼저하기로 하였다. A 장로가 피해자의 눈치를 볼 것이 염려되어 피해자와의 분리신문을 요청했고, 재판장은 피해자에게 법정 밖으로 나갈 것을 명하였다. 피해자는 거들먹거리며 법정 밖으로 나갔고, 증언대에 선 A 장로는 다행히도 당시의 사정에 대해 사실대로 증언했다. 그리고 다음 순서로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이 시작되었다.      


법정에서 본 피해자는 스스로 대단한 카리스마를 갖춘 영적 지도자로 여기는 듯 보였다. 피고인에 대해 자신의 영적 권위를 무시하고 떨어뜨린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변호인인 나를 하찮은 동조자 쯤으로 대했다. 피해자를 달래가며 차분히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 하나씩 물어갔다. 피해자에게 그런 소문이 나서 얼마나 속상했냐고 물으며 도대체 그 소문이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피해자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오래전부터 그런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말하며, 자신은 떳떳하고 금전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침 튀기며 강변했다. 나는 다시 A 장로에게 부흥회를 거절했던 이유를 다시 물어보라고 요청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고, 피해자는 A 장로에게 그런 부탁을 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원하는 대답은 다 들었다.     


그리고 이제 피해자에게 감추어 둔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이 소문 때문에 부흥회를 거절하였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피해자는 순간 일그러진 표정으로‘바로 그게 문제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이어서 피해자에게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본보기로 힘없는 피고인을 상대로 고소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대폭발. 그야말로 대폭발하고 말았다. ‘당신이 뭔데 나를 판단하냐’라며 삿대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적 카리스마를 갖추었다던 부흥사는 최소한의 시민적 교양도, 예절도 갖추지 못한 망나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법정에서 그 민낯이 드러나 버렸다. 재판장과 검사를 포함해 법정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이 사건 고소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재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몇 주가 지나 판결 선고기일이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책상에 앉아 서면을 쓰고 있는데 피고인이 할머니 교인 한 분과 함께 충주 복숭아 한 박스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판결은 당연히 무죄였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복숭아를 건네시는데 그렁그렁 가득한 눈물에 도저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마음고생 많으셨다고 이제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배웅하고 사무실에서 직원분들과 복숭아를 깎아 먹었다. 그 시절 그 사건의 무죄 판결은 여름 충주 복숭아 만큼이나 향기롭고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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