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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cos Dec 11. 2015

#02자소서

성장배경



#1

일찍이 친구들이 취업전쟁에 뛰어들었을 때도 넋 놓고 미드나 보는 나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서류의 합/불합을 이야기하는 중에도 내 관심은 오징어 다리가 제대로 달렸는가가 궁금했지, 아직은 청춘이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라고 여겼다. 7000자짜리 자소서를 써야 한다며 나에게 투정 부린 친구를 보며, 속으로는 그게 어려운가라고 생각하다 네 마음은 내가 잘 안다며 겉으로 위로해주는 나였다(알긴 개뿔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세상밖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자소서를 써야 하는 시점이 아니 써야만 하는 시점이 왔다.


#2

일반적인 자소서의 첫 번째 질문은 성장배경을 묻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복붙 신공의 힘을 빌리거나, 이전에 썼던 자소서를 가져다 쓴다. 하지만 나는 이전에 썼던 자소서도 없을뿐더러, 자소서를 쓴다는 경험 자체가 내 인생의 첫 경험이었기 때문에 다른데서 힘을 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껌뻑이는 커서를 바라보았다. 1000자 이 내니 십 분 정도 고민하고, 몇 번 수정하면 한 시간 정도면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몇 글자를 쓰긴 했지만, 도통 내 마음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번이나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그러길 반복하다 보니 언뜻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줄 하나 넘어가지 않았다.


#3

자괴감은 고민의 시간에 비례하고, 마감의 카운트다운은 예상했던 것 보다 나를 초조하게 만들다 곧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쓸 말이 없었나 싶었다. 스스로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스토리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때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왔었는데, 왜 선뜻 성장배경 칸을 채우지 못하는지 머리가 지끈 아팠다.

글쓰기 실력 때문일지도, 아니면 진짜 쓸 이야기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니 그냥 컴퓨터를 꺼버리고, 자버리고 싶지만, 모레까지 써야 될 글자가 대략 6000자가 남았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번 수정을 거쳐야겠지만 겨우 첫 란을 채웠다. 글을 쓰다 보니 과연 담당자들은 내 글을 보기나 할까 걱정되었다.


#4

자소서는 자기소개서의 줄임말임을 누구나 아는데, 정말 자기를 소개하는 글일까라고 다시 물으면 그렇지 않음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경쟁으로 인해 기형화 된 사회로 내 몰린 요즘의 세대들에게 자소서란 내가 어떻게 보여야 될지를 쓰는 소설이지, 담담하고 진실되게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글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5

쓰고 채워야 될 글자는 수두룩한데,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니, 잠을 재우지 못하게 하는 생고문과 다를게 없었다. 그러다 나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여 예쁘게 나를 포장하기 시작한다. 내가 살았던 인생과는 생판 다른 인생이 자소서란을 한 칸 한 칸씩 채우고, '참 잘 썼네'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미워진다.


#6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했던 세상 물정 모를 나의 말들이 기억났다. 


"그거 있잖아 자기 이야기를 잘 써 내려가면 되는 거야. 요즘 같은 시대에는 솔직함이 생명이거든, 니들이 솔직하게 글을 써 내려가면, 분명히 읽는 사람도 니가 쪼개기만 하는 놈은 아니란 걸 분명 알 꺼다"


자소서를 채우는 게 이렇게도 괴로운 것인지 성장 배경란 규정 글자 수 조차 채우지 못한 채 나는 마음속으로 친구들에게 저질렀던 악행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미안했다 친구들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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