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룸메로 착각한 남편
남편이 이혼 사유로 제기한 문제도 검토해보기로 한다.
아내와 있으면 나 자신이 나답지 않은 것 같다.
남편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나에게 말했다. 이는 앞선 글 <최악의 아내>에서 반성했듯이 남편의 방법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법을 요구해대서 그걸 맞추다 보면 자신 그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잘못한 것이 크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렇다면 남편이 저런 감정이 들 정도로 내가 그에게 도대체 무엇을, 왜 요구했는가.
가장이 누구면 어때서
2년 전, 남편이 대학원을 간다고 했을 때 나는 흔쾌했다.
음악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도 부족한 사람이 직장에서 씨름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그가 대학원에 가서 하고 싶은 음악 공부 실컷 하며 신나게 살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업무와 관계에 치여 사는 사람은 이 집 안에 나 하나로 족하다며.
시어머님은 격렬히 반대하셨다. 남자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시며. 1주일에 한 번 꼴로 나에게 따로 문자를 보내셔서 남편의 대학원 진학 결심을 꺾어줄 것을 부탁하시곤 했다. 어머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했지만, 나는 가장 역할에 성 개념이 없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무엇보다 어머님의 아들이 아닌 미래를 스스로 계획할 수 있는 한 어른으로서의 남편 뜻을 존경하여, 어머님 생각을 남편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내 주위 사람들도 나를 매우 걱정했다. 말로는 ‘멋있는 여자다’라고 하는데, 표정은 ‘너 이제 어쩌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마음도 무엇 때문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각자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서로 돕는 것이 부부이고, 또 이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부와 가정이 존재하니까.
신혼 부부의 일상
남편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좋아했지만, 불필요한 관계와 꼰대 문화 등으로 무척이나 괴로워했고, 집에 오면 지쳐서 너덜거리며, 둘이 앉아 TV만 보다가 잠드는 게 결혼 후 일상이었다.
그렇게 찌들어있는 남편이 대학원을 가면 얼마나 신나 할지 생각하니 내가 다 마음이 설렜다.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게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자신이 살짝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이제 우리 결혼 생활에도 새로운 활력이 오리라 기대하며!
그런데 이게 웬일. 남편은 대학원에서 새로 만든 관계도 좋고, 공부도 재밌다며 신이 난 듯했지만, 집에 들어오면 예전과 같았다. 피곤해하고, TV보다 잠들거나. 지쳐있는 남편 모습이 안 된 마음에 맛있는 저녁을 차리며 파이팅을 해주다가도, 대화가 점점 줄어드는 우리를 보면 ‘이게 신혼부부인가, 50년 산 부부인가’, ‘나는 일까지 하고 들어와 저녁밥 차리는 아줌마인가’하는 섭섭함과 생색들이 마음을 들락날락했다.
집에서도 재미있자
이 시점에서 나의 요구가 시작됐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큰 맥락은 “집에서도 재미있자. 나랑도 재미있자”였다. 남편도 “그러자”라고는 했지만, 체력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그놈의) 에너지가 부족한 남편에게 ‘집에서도 재미있기’란 무리였다. 남편은 그저 체력이 부족한 것일 수 있으나, 이런 무미건조한 일상이 계속되다 보니 나는 사랑받는 토끼 같은 아내가 아니라 마치 셰어하우스에 같이 사는 밋밋한 사이, 룸메이트가 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이러려고 대학원을 보냈나’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다 들어와 집에서는 무기력한 남편.
TV에서 보던 최악의 남편이 우리 집에 있네?
아내는 밥 차리는 아줌마도 룸메도 아닙니다.
본 글은 남편에게 사전 검수를 받은 글로, 주관적 뒷담화가 아닌 본격 앞담화임을 밝힙니다 :D
더불어, 저희 남편 앞담화는 오직 같이 살아본 저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기억해주세요! X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