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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준서 May 15. 2020

시험의 진짜 의미

무즙과 우병우, 그리고 순창의 불빛

‘무즙’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초등학생이며, 그 다음이 중·고등학생, 마지막이 대학생이다’는 말이 돌던 시기가 있었다. 시험을 봐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시기가 있었다. 56년 전 이야기다. 당시 학부모들이 가장 선망하던 중학교는 경기중학교였다. 160점 만점에 154.6점이 커트라인인 중학교다. ‘무즙 이야기’의 시작은 당시 입학고사 ‘자연’ 과목 18번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엿을 만드는 과정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재료가 무엇인지 묻는 문제였다. 정답은 효소 ‘디아스타제’였다. 학부모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무즙을 대신 넣어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논란이 일었고, 출제위원들은 해당 문제를 무효 처리했다. 그러자 이번엔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쓴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반발했다. 우리 아이들은 뭐가 되냐는 것이었다. 출제위원들은 기존의 결정을 뒤집고 디아스타제만을 정답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다.분노한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만든 엿을 교육감에게 던졌다. 밤을 새가며 농성했다. 이듬해 2월, 학부모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하고, 관계된 학생들을 모두 합격시키라’고 판결했다. 4년 뒤, 정부는 중학교 입시제도를 폐지했다.


‘태블릿 PC’가 우리 사회를 뒤흔들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최순실씨가 1위, 정윤회씨가 2위,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는 말이 돌던 시기가 있었다. 대통령의 친구가 나라를 다스렸던 시기가 있었다. 4년 전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우병우씨가 있다. 그는 20살에 사법고시를 합격한, 이른바 ‘소년등과(少年登科)’의 아이콘이다. 그의 아버지뻘쯤 되는 군수들은 그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사람들은 그를 ‘영감님’이라 불렀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던 그는 대한민국의 민정수석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으며, 최순실씨의 존재를 묵인했다. 그가 모셨던 대통령은 결국 탄핵됐고, 그는 그렇게 감옥에 갇혔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본다. 고속터미널에서 3시간 반을 꼬박 달리면 순창터미널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1.4 킬로미터를 가면 ‘옥천 인재숙’이라는 곳이 나온다. 엄격한 절차를 거쳐 선발된 200명의 학생들이 사는 곳이다. 그들은 학교가 끝나면 이곳으로 다시 ‘등교’한다. 수도권 등지에서 선발된 강사들이 그들에게 심화 수업을 제공한다. 새벽 한 시까지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자습해야 한다. 군청은 이곳에 매년 15억을 지원한다. 혹자는 ‘5만명이 사는 도시에서 200명을 위해 15억을 쓰는 게 말이 되냐’며 따진다. 군청은 ‘인재숙 설립 이후 교육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줄었다’며 반박한다. 논쟁은 17년간 이어졌지만, 인재숙의 불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무즙이 한국 사회를 흔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병우씨가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오를 수 있게 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때의 기준과 지금의 기준은 무엇이 다르고 또 같을까. 200명이 사는, 4층짜리 기숙사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정답을 여기에서 찾는다:


“호기심은 일상에서 나와요. 예를 들면 중력이 이 컵을 잡아당기는데 왜 이 컵은 테이블 속을 파고들지 않을까요? …(중략)… 이런 얘기를 꺼내면 평생 수석, 1등을 계속한 분들의 공허한 눈빛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할까?’ ‘시험에도 안 나오는 문제를 놓고 왜 고민하는 거지?’ 하는 눈빛입니다.”
-<공부논쟁> P. 203


시험에 나올 지식만이 가치 있는 지식이 되는 이상한 시대다. 공허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호기심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이상한 시대다. 그런 이상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제로섬 게임을 끝낼 순 없는 걸까. 이 긴 터널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있긴 한 걸까.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외치는 우리의 외침에, 답해줄 어른이 없어 보인다는 현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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