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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Jan 25. 2021

어린이라는 세계에 잠깐 얹혀 산다


지난 12월, 말랑한 수필을 읽고 싶어서 책을 몇 권 골랐다.


하지만 작년 4월 퇴사 이후, 마음속에 신경질 적인 공장장을 모시고 사는 덕에(돈, 돈을 벌 짓을 하란 말이야!) 사놓고도 꽤 오랫동안 읽지 못했다.



3권 중 2권은 친애하는 부쵸*일본어로 부장님이라는 의미이다. 예전 직장 부장님을 가리키며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친근한 동네 와인 친구이다. 물론 회사 다닐 때도 부쵸라고 불렀지만... 흠흠* 에게 빌려드리고, 나머지 한 권은 부쵸가 이미 읽으셨다고 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있었다.


그러면서 너무 좋은 책이라고 얼른 읽어보라고 하셨다.


바로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이다.




나는 아이를 2015년에 낳았다.


길에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세 살임에도 손가락을 두 개밖에 펼치지 못해 두 살이라고 어필했던 아이.


1년 후 4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세 살이에요'가 입에 붙어버려 1년 동안 세 살로 어필하고 다녔던 아이.



그 작고 말랑했던 아이가 자라 벌써 일곱 살이 되었다.


이 책을 처음 산 이유 중 하나는

내 딸, 승리에게 조금 더 의젓한 어른이 되고 싶어서였다.


작년에 아마 승리가 능숙하게 말을 할 줄 아는 아이였다면, 분명히 나에게 이랬을 거였다.


"엄마 이럴 거면 그냥 회사 다녀"


작년, 13년 간 근면하게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맞닥뜨리게 된 나의 정체성 혼란과 미숙함은 고스란히 양육 태도, 아니 승리를 대하는 말씨와 행동에도 번져갔다.


일을 따 낸 날이나 그 일을 비교적 멋지게 하고 온 날에는 아이에게 한없이 자상한 엄마가 되어 있었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꼬장꼬장한 꼰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하듯,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으므로 나는 2020년 코로나 꼰대가 되어 아이를 '답답하게'만들었다.




엄마, 승리 여기가 답답해


아이는 매 순간 자란다.

스스로 자라는 몸과 마음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미운 몇 살'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다.

나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책에서도 읽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머지 논리적으로만, 네모나게만 생각하고 싶은 날이 되면 동그랗디 동그란 아이를 각으로 내몬다.


우리 집 동그란 아이는 순한 기질의 소유자이다.

엄마의 으름장에 각을 잡거나, 울면서 각을 잡거나 하며 상황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그렇게 무섭게 말하면 승리 여기가 답답해"

아이가 자기의 조그만 손가락으로 조그만 가슴을 가리키며 울며 말했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영화에서처럼 삐이-하고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강약약강.

바깥세상에서는 나름 약한 자의 편에서 서왔다고 자부했는데,

나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에게 '논리'와 '위엄'을 내세우면서 나의 언어로 아이를 구겨버리고 있던 것이었다.

강강약약, 최악이었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몇 주 전의 다이어리를 보면 자괴감으로 가득하다.


승리를 답답하게 만들지 말자.

내가 대하는 태도는 승리의 거울이 되고 기준이 된다.

나는 지금 부당한 겁박에 쉽게 설득당하는 아이로 키우고 있다.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바에 나쁜 엄마는 되지 말자.


© Bessi, 출처 Pixabay



우선 지방 출장이 잦은 남편에게도, 현재의 갈등상태를 알렸고 (아이와의 갈등이 아닌 스스로의 내적 갈등상태) 다행히 새해에 코로나가 조금은 진정되어 아이는 다시 등원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나의 지친 육체와 영혼은 아이를 재우고 난 후만을 갈망하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승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상황은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등원 길, 아이를 반겨 맞이해주는 선생님들을 보며 어렴풋이 이렇게 생각도 해보았다.

나의 아이, 나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하루에 몇 시간만 맡겨지는 아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도 아이와의 시간은 하루 몇 시간만 주어지기는 한다)


이적 어머니로 알려진 여성학자 박혜란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20년 동안 우리 집에 머물다 가는 ‘손님’으로 여기세요.
집에 온 손님이 주인인 내게 조금만 잘해줘도 한없이 고맙고,
뭘 해라 하지 마라 요구하기 어렵잖아요.
그러면서 아이와 심리적 거리가 생기고,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답니다.



심리적 거리.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오히려 잘 지켜졌던 것 같다.

그저 나에게 이런 기적이 생겼다는 것이 아득할 정도로 기쁘고 한편으로 불안해서 말도 골라서 하던 시절.


그런데 아이가 커갈수록 나는 뭔가 뻔해졌다.

아이에게 건네는 말도 다그치는 말투도 마치 어디선가 본 것처럼 클리셰 투성이었다.

마치 모든 집이 이렇게 키우고 있잖아라고 생각하는 듯 무분별하게 재촉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아이가 정상 범주에서 어긋나기라도 할 것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이 책을 샀지만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이 책을 피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이 감히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을 읽고 앉아있는 꼴이 위선인 것만 같았다.

오늘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이 책.

절반을 읽으며 마음을 먹은 것은

'아, 다시 2~3년 전의 다정한 승리 엄마로 돌아가야겠다'라는 마음이 아니라

'아, 차라리 구몬 선생님처럼 (저자는 독서교실 선생님이다) 대해야겠다'는 것이다.


그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이의 사랑스러움, 성장의 모습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대상.

감히 내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절대 '덜'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랑의 마음이 조절이 되지 않아서 너무나 그 사랑에 이입한 나머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때문에 '심리적 거리'를 조금 더 두어서 언젠가 나를 떠날 손님 대하듯 해보기로 마음먹어 본다.


아이가 임시적으로 나에게 맡겨진 손님이라면,

넘어졌을 때 '그러니까 엄마가 뛰지 말랬잖아'가 아니라 '괜찮아? 다친 데 없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 mathildelangevin, 출처 Unsplash


사회적 체면은 잘 지키면서 가정 내에서는 폭도로 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일같이 뉴스에서 쏟아진다.

혀만 끌끌 차기에는 나의 부족함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는 말한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기본적으로 환대한다고.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매 순간 아이에게 환대받고 있다.


아침마다 말랑하고 뜨끈한 손으로 나를 깨워주고

하원 때마다 나를 꼭 안아주며 말한다.

"엄마 오늘도 일 많이 했어? 많이 걸었어?"라고 물어봐 준다.



승리라는 세계에 잠깐 얹혀사는 나는 오늘도 부끄럽고 오늘도 깨닫고 오늘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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