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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Jan 14. 2021

방망이 깎는 젬마 씨의 일일


#시간이_써주는_글


지난 1월 4일, 새해의 첫 월요일부터 꼭 열흘이 지났다.

열흘 동안 나는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된 기분으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아서 글을 썼다.


하루키의 소설처럼 멋진 문장들은 아니지만,

일본어 학습자들이나 크리에이터들이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일본어 문장과 그에 대한 해설을 써내려 갔다.


교재에 쓰이는 글은 창작보다는 정리정돈에 가까운 글이다.

분명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지만 창의적인 우뇌가 아니라 논리적인 좌뇌를 쓰는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워드가 아닌 엑셀에 쓴다.



소설이라면 하루에 한 문장을 쓰는 날도 있을 테고 하루에 10페이지를 쓰는 날도 있을 테지만,

교재에 들어가는 글은 웬만해서는 계획대로 흘러간다.

즉 시간과 시스템이 써 주는 글이다.



영어와 중국어 부분을 담당해서 쓰고 있는 (살아있습니까..?) 공동집필자들도 나도 10년 넘게 교육기업에 다녔으니, 하루 정해진 양만큼의 '방망이를 깎는 것'에는 굉장히 익숙하다.


하지만 세상 일이 모두 그렇듯 익숙하다고,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방망이_깎는_법


지난 몇 주동안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패딩의 한쪽 주머니에 아이폰을, 다른 한쪽 주머니에는 에어 팟을 챙겼다.

출근 준비 끝.


엄마에게 '나는 준비물이 뇌랑 손가락이네'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나왔지만 정말이지 그 기간 동안은 늘 챙기던 다이어리, 스케줄러, 펜 등은 아예 챙기지 않았다.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 나에게 다른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렇게 계획을 짠 것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서로의 스케줄을 체크해주는 프리랜서 친구와 통화를 할 때마다 그 친구는 어제는 '방망이 얼마나 깎았어?'라고 묻곤 했다.

이렇게 하루에 4시간 동안 엑셀 파일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 없이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를 반복하는 이 행위가 방망이 깎는 것과 달라 보이지 않았겠지.



말 나온 김에 나의 방망이 깎는 프로세스를 소개해 보자면,


1. 오피스에 도착하면 10년 전에 시드니에서 산 스타벅스 시티컵 (473ml)에 물을 가득 따르고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책상에 앉는다.


2. 82% 드림 카카오와 씹어먹는 비타민은 눈 앞에 둔다.


3. youtube를 켜고 뽀모도로 타이머 영상을 켠다.

-> 25분 작업 + 5분 휴식 이 여섯 번 돌아가는 루틴의 영상인데 글 마지막에 링크를 걸어 둘 예정이니 대한민국의 모든 방망이 깎는 청년들은 참고하시길


4. 브라우저는 일본 구글 웹, 일본 아마존 웹, 네이버 일본어 사전, 유튜브 뽀모도로 영상만 띄운다.


5. 시간을 잊고 방망이를 깎는다.



그렇게 열흘 동안 꼬박, 주말을 포함해서 방망이를 깎아댔고 이제 끝이 보인다.

무슨 요일인지 뭐가 중요한가



오늘이 내일 같고 어제가 오늘 같던 열흘이 지나갔고 내일이면 1차 원고를 넘긴다.

(그래서 그렇게도 쓰고 싶던 브런치를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이다)



#허리도_멘탈도_나가지_않는_방법


매일 4시간, 길 때는 6시간을 원고에 매달린 후, 내일을 기약하며 퇴근할 때의 내 심정은 늘 같았다.

'제발 어디 아프지 말자'


어엿하게 계약서도 쓴 마당에 마감을 지키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프리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이 폭풍 같았던 열흘 동안 반드시 지킨 것이 하나 있는데,

매일 8,000보 이상 걷기.


10,000보는 너무 많을 것 같아서 8,000보로 정했는데 의외로 걷다 보면 만보를 넘기기 일쑤였다.

보통 8,000~10,000보를 걸으려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은 필요하다.


게다가 최근 열흘 동안은 눈이 많이 내린 날도 있었고 엄청난 한파가 밀려왔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도 짬을 내어 걸었다.

(앞머리에 고드름이 얼더라)


그 덕에 허리 건강도 지킬 수 있었고 멘탈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습관이 익으면 그 자체가 보상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 걷기는 이제 즐거움이다.





매일 4시간씩 몰두했던 시간, 마감이 끝나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정신없던 연말연시를 보낸 만큼 쉬라는 이야기도 듣지만 모처럼 엔진이 걸린 이상 그냥 쉬기는 또 아쉽다.


뭐가 되었든, 일단은 내일까지의 마감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마치 마감을 해버린 것만 같아서 마음이 자꾸 풀어진다 안돼...)



** 참고로 제가 쓰는 뽀모도로 타이머는 이것입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XY59edl7p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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