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마흔을 읽고나서야
인생은 처음 40년 간은 나에게 텍스트를 준다
<쇼펜 하우어>
마흔이 다가오면서 마흔 팔이하는 책은 일부러 피했다.
(마흔을 내세우는 책 제목은 생각보다 많다)
생각해 보면 마흔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책 좀 낼 수도 있는 건데, 책 제목을 읽기만해도 윽, 하는 느낌이 들었던 걸 보면 나는 마흔이 되어가는 걸 어지간히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난주, 4개월에 걸친 프로젝트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4개월 동안 읽은 책들은 거의 심리나 협상, 행동경제에 대한 책이었고 거의 30권 가까이 읽고 나니, 이제 이런 책을 읽는 게 가장 쉬운 뇌가 되었다.
뇌에도 여름휴가를 주자, 싶어 밀리의서재를 기웃거리던 중에 <맙소사, 마흔>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만 보고 도망가려다 리뷰가 눈에 들어왔다.
낄낄거렸다, 는 문장 하나에 사로잡혀 ‘읽다 별로면 삭제해야지’ 하는 생각에 다운받았다.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한 지난주,
동네 공원에서 읽어내려가다,
나역시 말 그대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사는 기자출신 미국인 여성이 쓴 이 책.
그저 그런 드립의 향연만이 아니었다.
(드립이 많긴 많다 게다가 전부 내 취향이다)
특히, 이방인의 눈에서 바라본 프랑스 사람들과 그들의 사고방식, 인간관계가 너무도 새로웠고 신기했고 닮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 심리적인 거리
프랑스의 기혼 여성들은 남 앞에서 남편 흉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남편의 단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단점이 없다고 하기까지 한다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기혼 여성들이 남편에게 콩깍지가 씌여서가 아니다.
(이혼율을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상대는 내 소유물이 아니기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는 것.
그리고 단점을 가만히 뒤집어 보면 내가 반했던 이유-장점-이 나온다.
내가 사랑했던 이유 - 장점- 에 옵션처럼 붙어서 오는 단점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이라고 굉장히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이 무슨 감정과 이성의 대축제인가!)
두번째로, 파트너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일순위는 '나'이다. 그 다음에 가족이 있고 파트너도 있는 것. 그리고 이런 심리적 거리는 둘 사이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도미니크 칸이 성추문을 일으켰을 때 그의 아내이자 유명한 기자였던 안 생클레르는 이혼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나는 천사도 아니고 희생양도 아닙니다. 나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며 완전히 독립적인 상태에서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합니다." 물론 생클레르의 마음이 바뀌는 것도 그녀의 자유였다. 나중에 그들 부부는 이혼했으니까.
나는 나, 너는 너,
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을 남편과 공유하고 있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사실 나도 약간 이런 스타일이긴 한데,
아이와 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해도 일 이야기는 남편과 서로 잘 하지 않는다.
내가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유튜브 채널을 보는지 남편은 알지 못한다.
가끔은 일터에서의 갈등과 어려움을 남편과 시시콜콜 나누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든 적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삶의 모든 부분에서 동기화가 되는 것은
자립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말이 조금 새지만 나의 20대 연애가 그러했다.
그 친구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내가 삼시세끼 무엇을 먹었는지도 알아야했고,
어느 경로로 퇴근하는지도 늘 궁금해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혼자 있고 싶은 날에도
회사 앞에서, 집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나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뿌리가 뽑힌 것처럼 두발을 딛고 서있는 것도 힘겨웠고
콘센트가 뽑힌 것처럼 삶의 전원이 내려가버린 것 같았다.
때문에 그 이후의 연애 (그리고 지금의 결혼생활) 에서는
자립에 대한 것을 계속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말하자면 뼈아픈 이별로 길러진 후천적 자립심같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비단 남녀관계뿐 아니라 의존도가 높은 부모자식, 친구관계에서도 이런 심리적 자립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가의 전작, 프랑스 아이처럼도 읽어볼 생각이다. 네 살이면 자립 시키라던데..)
# Femme libre
책 에필로그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의미의 Femme libre는 그야말로 프랑스 여성들에 대해 내가 꽂혀버린 계기가 된 것 같다.
프랑스의 보편적인 담론에서 20대와 30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남들이 기대하는 행동을 하는 시기로 본다.
일을 배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하지만 40대가 되면 자신에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행동을 하며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
프랑스판 '자유로운 여성'의 자유는 대체로 내면에 존재한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자신의 욕구에 맞춰 현명하게 삶을 이끌어 간다. 마치 프랑스에는 성년기의 발달 단계가 하나 더 있는 것만 같다. 여성들은 그 단계에 도달하기를 갈망하고, 그 단계에 도달하면 축하를 받는다. 자유로운 여성에게는 품위가 있고 목표의식이 있다. 그녀는 어떤 일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쾌락을 누릴줄도 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목표가 아닐까? 꼭 프랑스 여성이 아니더라도.
나를 일순위로 두지만, 역설적이게도 스스로에게 과몰입하지는 않는 삶.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반대로 살고 있다.
나보다 일, 나보다 파트너, 나보다 자식.
내가 아닌 것을 삶의 일순위로 척척 내주지만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는 과몰입한다.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매순간 피해자로 살아간다.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욕구에 따라 삶을 현명하고 우아하게 이끌어 가는 것.
40대의 든든한 이정표가 생긴 것 같은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당신이 40대가 되었다는 징후들> 가 챕터마다 소개되어있는데,
어찌나 구구절절 맞는 소리인지 파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몇 가지 소개하자면,
- 컴퓨터 화면에서 출생연도를 찾기 위해 마우스휠을 아래로 내릴 때 마음이 초조해진다
- 맨스플레인을 금방 알아차린다
- 피부가 쪼글쪼글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피아톤 사진을 보다가 당신도 그 여성과 비슷한 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화장을 안하고 나가면 피곤해보인다는 소리를 계속 듣는다
-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 식당을 선택한다
- 체중이 3~4킬로그램씩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나니 그 살에 일종의 애정을 느낀다
- 당신에게 사람들을 조종할 능력이 있으며, 어떤 사람들 역시 오래전부터 당신을 조종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신기하게도 신발 사이즈가 하나 커졌다
- 세상 모든 일의 숨은 비용을 알게 된다. 신이 났던 어린시절 뒤에 당신의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세상에는 똑똑한 바보와 상냥한 악당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
- 2시 전에 점심을 먹지 않으면 몸이 떨릴 정도로 허기를 느낀다
- 당신이 가사를 다 외우는 노래는 적어도 20년 전 곡들이다
- 작은 것 하나만 바꿔도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