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틈이 필요한 순간
얼마 전 ‘학부모 간담회’라는 것을 다녀왔습니다. 아이가 올해 4학년에 올라갔지만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한 건 입학식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분위기일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습니다.
강당에 들어서자, 무대에 띄워놓은 커다란 스크린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는데도 부모가 몸이 편해지지 않는다면,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여전히 대신해 주고 있는 겁니다’
오은영 박사도 양육의 목표는 오로지 독립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에는 무릎을 탁 쳤지만 생활로 돌아오면 아이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앞서 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몸이 앞서 아이의 자잘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상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아이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지 못해서였습니다. 신속 정확한 어른의 결과물은 아이의 의존성을 더 높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속 정확한 결과물은 과연 어른에게는 어떤 것을 안겨 줄까요?
앤절린 밀러가 쓴 <The Enabler>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게는 코칭과 관계의 심리에 대해 알려준 아주 귀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는데요. 읽어보면 육아서에 가깝기보다 서스펜스(?)가 가득한, 인간 심리에 대한 책입니다.
나의 인간관계에서 어떠한 패턴이 발견된다고 생각이 드는 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에는 두 가지 인물의 유형이 등장합니다.
조장자(Enabler)와 의존자(Dependent).
작가는 오랜 세월 본인이 조장자였다는 사실을 참담하게 고백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조장자는 한마디로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거룩한 명목으로 오히려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어디까지나 선의에서 시작하기에 이런 행동이 점점 스스로에게 우월감을 주고 상대인 의존자를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죠.
의존자는 크고 작은 딜레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 조장에게서 받는 편의와 물리적 환경을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장자에게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조장자는 의존자의 감정적 드라마를 떠받쳐 주며 점점 본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데요. 흥미로운 사실은 본인에게 점점 의존하도록 조장하는 것이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당시에는 깨닫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의에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죠.
조장자에 의한 의존은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기본적인 상호 교환과는 다릅니다. 건강한 상호 의존 interdependence과 책에서 말하는 기생적인 의존은 어찌 보면 정반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쪽은 성장을 촉진해 주고 나머지 한쪽은 성장을 저해한다는 측면에서 말이죠.
그렇다면 조장자는 왜 계속 '조장'을 하는 것일까요? 조장자의 입장에서 본인은 희생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실은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빙산(의식)에서는 ‘나는 희생하느라 힘들어’라고 하지만 저 아래에 있는 빙하(무의식)에서는 ‘나는 이 상황이 사실 편안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구원자, 영웅 서사를 마다할 무의식은 없습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는데도 부모가 몸이 편해지지 않는다면,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여전히 대신해 주고 있는 겁니다’
이 글을 보자 먼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요새 에너지를 얼마큼 가족에게 분배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었던 귀한 문장이었습니다.
그러고 문득 조직문화를 강의할 때 만났던 기업의 리더들, 그리고 팀으로 고민하던 창업가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커리어 코칭 때 만난 회사가 나의 성장에 관심이 없어서 힘들다는 재직자들, 회사가 나에게 업무를 잘 가르쳐 줘야 한다는 구직자들도 떠올랐습니다.
조장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는 일터에서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까요?
리더는 조장자가 아니라, 팀원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가 아니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팀원들의 역할을 대신해 버리는 리더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지속 가능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결과적으로 팀원들이 수동적으로 리더의 지시만을 기다리며 의존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조직은 더 이상 건강하게 작동할 수 없겠죠.
성장 중인 팀원, 또는 구직자들은 건강한 팔로워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리더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 대신,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에서 배울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 필요한 역량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을 직접 탐색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작은 업무라도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태도를 가지면, 리더 역시 신뢰를 가지고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입니다.
건강한 관계는 리더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팀원 역시 오히려 의존을 끊어낼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구직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조직이 나를 가르쳐야 하고, 돈도 줘야 하고, 복지도 줘야 하는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공해 주길 바라기보다는, 나는 스스로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를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조직을 통한 성장과 스스로의 성장. 그 역할을 엄연히 구분해 보는 것이 구직을 향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쪽이 짊어지거나 당연히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적절한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실수 투성일 겁니다. 아이가 엎지를까 봐 주스를 주지 않기보다 한 손에 걸레를 들고 주스를 건넬 수 있는 그 용기, 팀원이 가져온 그 엉망진창인 결과물을 시간을 들여 피드백할 용기, 그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 등교한 아이가 두고 나간 영어 숙제를 가만히 바라보다 가져다주지 않기로 해 봅니다. 쉽지 않지만요.
조장자/의존자 성향을 점검해 보세요!
아래 체크리스트를 통해 스스로의 관계 패턴을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1. 조장자(Enabler) 체크리스트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과하면 상대의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조장자 성향이 강한가요?
✅ 해당되는 문항에 체크하세요.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누군가가 실수할 것 같으면 미리 개입해서 해결해 준다.
주변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상대가 나를 실망스럽게 해도 쉽게 용서하고 계속 도와준다.
상대방의 감정 기복에 맞춰 내 행동을 조절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돕고 나서도 감사받지 못하면 서운한 감정이 든다.
도움을 주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편이다"라고 생각한다.
결과 해석
7개 이상: 조장자 성향이 강한 편인지 돌아보세요. 상대의 성장을 돕는 것과 방해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6개: 조장자 성향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때때로 도움을 주기보다 기다려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0~3개: 조장자 성향이 낮습니다. 상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군요.
2. 의존자(Dependent) 체크리스트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나치면 자립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의존자 성향이 강한가요?
✅ 해당되는 문항에 체크하세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혼자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 하기보다 누군가 도와주길 기대한다.
책임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내가 힘들 땐 주변 사람들이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수했을 때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도움을 주면 너무 편안해서 스스로 노력하지 않게 된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는 익숙한 환경에 머무는 것이 좋다.
"나는 다른 사람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고 느낀다.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지 않으면 서운하고 불안하다.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때때로 상대가 나를 더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 해석
7개 이상: 의존자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자립을 키울 수 있는 작은 도전이 필요합니다.
4~6개: 어느 정도 의존하는 경향이 있네요. 도움을 받을 때와 스스로 해결할 때의 균형을 고민해 봅시다.
0~3개: 의존자 성향이 낮습니다. 독립적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강한 편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