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마케터, 4개의 회사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한국의 공연계, 엔터계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공연 쪽에서 유명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졸업했는데 취업은 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과 할리우드에서 일했던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홀로 외로운 유학 생활을 더는 못 버티겠어서 결국 마지막 인턴십을 중간에 그만두고 귀국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거의 바로 무대감독 포지션으로 오픈런 공연에 합류하게 되었다. 근데 낌새가 이상했다. 해외 관광객들이 메인 타깃이었던 그 공연은 2020년 초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코로나 때문에 직격탄을 맞아 새로 인원을 충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게 1주일 만에 나는 해고당했다. 말이 해고지, 근로계약서도 안 썼는걸. 지금 생각해 보니 1주일 일한 값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한국에서의 내 첫 직장은 마무리되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에 돈을 너무 많이 썼는데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과연 내가 취업은 할 수 있을까, 많이 바라지도 않고 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일반 직장인정도 만으로도 충분한데 과연 어떻게 하는 걸까, 나는 이제 그럼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진로 고민이 앞을 가리기 시작했고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감독으로 일하고 싶은데, 한국 공연계에서는 학연이 중요한 듯 보였고 주변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공연 쪽에서는 신규 채용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점점 막막해졌다.
학창 시절에 했어야 하는 진로 고민을 그제야 하기 시작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그냥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은 사실 무대, 공연, 춤 같은 예능 쪽이었지만 집안 특성상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보니 본격적으로 그런 것들을 배울 수는 없었다. 소위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다는 그런 말들만 보고 나는 무조건 서울로 대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아무래도 서울로 가면 기회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다 보니 처음 들어갔던 대학에서 자퇴를 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럼 나는 뭘 하면서 살아야 하지. 일반 회사에서 채용하는 직무 리스트를 훑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다. 마케팅. 오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데? 채용 공고에는 보통 전공 무관이라고 되어 있었고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해볼 만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서비스나 상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직무가 마케팅이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고 보니 내 성격과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마케팅 직무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내 첫 번째 회사는 디저트를 만드는 프랜차이즈 회사였다. 집 주변에서도 봐왔던 브랜드라서 기대도 되었다. 근데 웬걸. 그 회사 대표는 점주들에게 이미 고소가 진행 중이어서 대표자 명의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오 이곳은 안 되겠다. 불법 운영 회사라니. 1개월이 조금 넘은 시기에 (지금 생각해 보니 한 달을 버틴 게 대단하다) 퇴사를 했다. 첫 회사에 실망하고 나니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이 무서워졌다. 너무 극단적인 곳을 경험하고 나니 아무래도 회사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나 보다 싶었던 것이다. ‘그냥 카페 알바와 영어 과외를 병행하면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스벅 파트타임 지원서를 작성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채용 플랫폼에 올려 둔 이력서를 보고 채용에 관심이 있다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패션 어플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었다. 이곳이 바로 나의 2번째 회사가 되었다. 첫 번째 회사에서의 경험을 어떻게든 이력서에 좋게 포장하여 3개월 인턴십이라는 명목으로 마케팅 경력을 강조하여 입사를 할 수 있었다.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경직된 조직 문화에 사내 정치가 판치는 이른바 좋소 기업이었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그래도 2번째 회사에서 마케팅이란 걸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년을 채우기 약 10일이 되지 않아 퇴직금을 못 받은 게 아직도 너무 아쉬운 2번째 회사를 떠나 3번째 회사인 외국계 화상영어 플랫폼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2번째 회사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링크드인을 통해 연락 온 회사와 한 달 넘게 채용 프로세스를 거치고 나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채용에 오랜 시간을 들이는 회사라 처음부터 이미지가 좋았다. 대만에 있는 스타트업이었는데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스타트업 분위기였다. 공유 오피스에서 화상 회의로 해외 직원들과 미팅했다. 무엇보다 100% 재택근무였기에 홈오피스를 예쁘게 꾸미고 집 주변에서 예쁜 카페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일했다. 3번째 회사는 꼭 1년을 넘겨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적응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여기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한국 지사가 제대로 설립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실업자였다. 거기다가 외국계 회사였기에 대만에서의 성공 경험을 그대로 복붙 하고자 하는 경영진이 한국에서는 절대로 통하지 않을 마케팅을 강요하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재택근무였지만 하루하루가 너무 고역이었다. 매일 집에 있으니 지쳐갔고 실제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같은 팀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공적인 미팅만 이어졌다. 결국 6개월 만에 퇴사를 결정했다.
이쯤 되니 내 이력서가 너무 엉망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동안 여러 회사에서의 경험을 마케팅 포트폴리오로 잘 만들어서 성과 위주, 프로젝트 위주로 구성했다. 그 포폴로 생각보다 쉽게 4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내 마케팅 커리어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직했던 4번째 회사는 외국계 입시 컨설팅 회사였는데 영어로 업무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한국에 제대로 된 지사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회사 분위기와 팀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맡아서 할 수 있던 환경 덕분에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1년 넘게 한 곳에 머무르니 점점 일도 손에 익고 신규 팀원이 입사한 후에 온보딩도 해볼 수 있었다. 아쉽게 한국 지사의 상황이 악화돼서 침몰하는 배에 머물 수 없다는 마음에 뛰쳐나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4번째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은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대망의 마지막 회사도 먼저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받아서 면접을 보게 된 곳이다. 여기는 국내 에듀테크 스타트업이었는데 정말 내가 꿈꾸던 회사 분위기와 사람들을 만났다. 나에게 정말 맞는 회사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찰나에 만났던 곳이다. 내가 그리던 복지, 업무 환경, 발전 가능성, 비전이 다 들어맞는 회사였다. 하지만 딱 하나. 마케팅 팀장님이 최대의 빌런이었다. 그래도 그 외 모든 것이 좋았다. 여기는 진짜 오래 다닐 수 있겠다 싶은 그런 회사였다. 이제 마케팅 직무와는 안녕하기로 결심해 아쉽게도 6개월 만에 퇴사를 결정하였지만 속으로는 정말 응원하고 있는 그런 곳이다. 나의 마지막 회사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곳이라서 감사했다.
수도 없는 면접을 보면서 누군가는 이제 이력서 관리가 필요한 것 같다고 한 곳에 너무 짧게 있는 건 나중에 독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그런 소리만 가득하다. 솔직히 나도 그런 이야기들에 많이 흔들렸다. 이직은 레벨업을 위해 해야지 동급으로의 이직은 득이 될 것이 없다는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이직을 고민했던 수많은 잠 못 드는 밤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갈길을 갔다. 면접에서 이직 히스토리를 물어보실 때면 나는 나만의 스토리로 이직해야만 했던 이유를 자신 있게 설명했다. 스스로 움직일 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낄 때만 움직였기 때문에 억지로 포장하거나 지어낼 필요가 없는 이유들이었다. 그런 진정성이 면접관들의 마음 또한 움직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직 이유뿐만 아니라 각각의 회사에서 나는 필요한 스킬들과 기술들을 배우고 익혔다.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이직도 어렵다. 아무튼 나에게 이제 회사는 없을 것이다. 마케팅이란 일은 어쩔 수 없는 상황과 타협하여 시작하게 된 일이었으니 어쩌면 그렇게 계속 내가 원하는 회사, 원하는 일을 찾아 이동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4년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 인간관계, 사회생활이라는 값진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 힘들면 떠나는 것도 머물러 있는 것도 모두 본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