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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icity May 15. 2022

#25. 거짓말에 합의한 허수아비,실패한 나의 해방일지

나의 아저씨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모든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로 꼽고 추앙하는 "나의 아저씨"


나는 그 추앙에 선뜻 동참하지 못했었다.


아저씨와 그 무리들이 싫었다.  

나의 아저씨가 어깨에 짊어진 짐을 보는게 피곤했고 너무나 끈끈하게 엮여있는 가족들이 부담스러웠다.


오히려 아저씨의 아내에게 마음이 갔었다.  


그녀는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했지만 아저씨 주변을 둘러싼 단단한 가족과 무리의 울타리에 들어가 어울릴 수 없어 생기는 극심한 외로움과 나의 아저씨 어깨를 짓누른 무거움때문에, 옆에서 외로워하는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한 것이 그녀를 거기까지 몰고간 것 같았다.  


나의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의 아내에겐 외로움과 짓누름만 주는 괴로운 사람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주목받는 배역이 아니었고, 그녀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녀에 대한 얘기가 나오더라도 비난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슬펐다. 그녀가 대신 선택한 사람이 찌질하고 못난 사람이었다는 것도 마음아팠다. 아무나 사랑한것 같은, 아이유도 아저씨도 아닌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그리고 나의 아저씨를 쓴 작가가 나의 해방일지를 한다고 했었을때, 또 나혼자 핀트를 못맞추며 드라마를 보는게 아닌가 싶었다.


손석구를 애정하는 나의 마음(아마도 9.9할)은 해방일지로 이끌었고 어제 미정의 독백을 들었다.



인간은 다 허수아비같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수도

인생은 이런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해
죽어서 가는 천국따위 필요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꺼야


미정의 저 이야기를 들었을때 너무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사람들에게 지친 마음,

누구도 이해해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  

그래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하지만 도망칠 수 없는 환경,

혼자이고 싶다가도,

누군가와 나눌 수 없어 미칠것 같은 외로움


그 마음이 차올라서 더이상 감당하기 어려울때 구씨처럼 노른자 밖을 탈출했었다.


구씨가 왜그렇게 산을 보고, 달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술을 들이키는지 너무 느껴졌던 그 순간..


지금은 그런 마음에 우울이나 조울이라는 이름도 붙여주고 치료도 하고 약도 주지만 그런 생각도 못하는 시기였다.


매일 산을 찾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철학책을 읽으러 다니고, 여행을 떠나고 사진을 찍고, 모르는 사람들에 섞여 수영을 했다. 가끔 노른자 밖에 있던 친구들에게 위로받았다.


치유의 시간이었다.


구씨는 미정이 살리고 미정도 구씨로부터 구원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현실에서 나의 구원과 해방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구씨는 다시 노른자 속으로 들어간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씨는 예전의 구씨가 아닐 것이다.


결국 나도 다시 나의 노른자로 돌아갔고, 여전히 노른자 속에서 살고있다. 하지만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 전의 나는 죽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껍데기는 같아도 알맹이가 다른 사람으로.


어제 미정의 대사를 들으며 그 많은 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매일 걸었던 길,

계절마다 바뀌는 산의 향기와 꽃, 나무, 벌레들.

지금은 기억에서 멀어진 철학과 역사책들과 스승님.

나를 위로하던 많은 문장들과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외롭고 외로운 나의 친구들 로미.


지금을 잘 살아야겠다

다짐하고 다짐했던 무수한 마음들.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때 좌절했지만 명확했다.

나는 다시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신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나도 그런 믿음을 가졌으면 좋았을텐데...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다.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는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 것도 노른자로 돌아간 시점부터였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없어.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전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태어나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꺼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거지,
그건 다시 태어나는게 아니야.

그러니 이 생을 그냥 열심히 사는수밖에
건강하게 잘 사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치유가 필요한 때가 온다

구씨에게 치유는 미정이라는 사람이지만 살다보면 그 치유는 음악일수도 산일수도 책의 구절일수도 스승일수도 있는 그 어떤 무언가다. 그걸 찾아야, 찾을 시간이 주어져야 구원받고 해방될 수 있다.


구씨에게 미정이 지금은 구원이지만,

냉정한 현실엔 미정과 구씨는 없다.

혼자만 있을뿐.


사람이 서로를 구원하고 해방시켜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되기도하지만, 그건 아마도 잠시일뿐일 것이다. 찰나.


미정은 구씨에게 또 다시 지겨운 여자가 될수도 있고, 구씨는 미정에게 또 한명의 개새끼가 되는 시간이 온다.

슬프게도 살다보면 온다.


구원은 찰나이고, 남는건 목 늘어난 티셔츠같이 구질구질한 일상일 것이다.(물론 구씨의 티셔츠는 달라보이네..)


그래서 미정도 지금은 합의하지 않겠지만,

살다보면 언젠가 거짓말에 합의하는 허수아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않으면 살기 힘들테니까.


그래서 그 대사를 말하는 미정과 구씨의 모습, 아직 남은 순수함과 열정이 좋았고, 한편으로 아팠다.


드라마라 다행이다.

드라마는 구원과 해방의 순간에서 끝날테니까.


나는 거짓말에 합의한 허수아비 인생이지만

미정이는 살아서 천국을 보고

구씨는 허수아비로 인생을 살지 않을테니까.


나의 (실패한) 해방일지가 아니라

나의 해방일지로 끝날테니까.


+

아,

허수아비로 살지라도,

구씨에게 지겨운 여자가 될지라도,

찰나라도 좋으니

구씨는 만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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