넙죽의 베네룩스 여행-벨기에 브뤼셀 3-1

그랑 플라스, 그리고 엄마

by 넙죽

플랑드르의 후예, 벨기에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벨기에는 초콜릿과 와플, 맥주 등으로 유명하지만 이 나라가, 아니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섬유 산업으로 유명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직 산업으로 유명했던 이 곳 플랑드르 지역은 중세 시절부터 매우 부유한 지역이었고 무역 또한 융성하여 상공인들의 힘이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또한 유럽의 강국들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겨지는 지역이라 영국, 프랑스 등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던 곳이다. 플랑드르의 후예인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의 여행을 나는 시작했다.

공원 너머로 저 멀리 브뤼셀 시청사 건물이 보인다
브뤼셀의 상징인 오줌싸개 소년 동상

상인들과 도시 권력의 증명, 그랑플라스


한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은 도시의 중앙광장이다. 벨기에의 중앙 광장인 그랑 플라스는 야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행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광장을 채우고 있는 그 무엇이었다. 보통 유럽 도시들의 광장은 성당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럽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였으니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성당이 아니라면 왕궁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허나, 그랑 플라스를 메우고 있는 것은 도시 권력의 상징인 높다란 시청사와 직인들의 조합인 길드하우스들이었다. 과거 중세의 중심이 영주와 장원, 그리고 농노들이었으나 상공업이 발달한 이후부터 유럽의 중심은 도시와 도시의 상공인들이었다. 이들이 이후 자본주의와 시민혁명의 주인공들임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다시 말해 브뤼셀이라는 도시의 핵심은 상공인들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시의 운영에 상당 부분 입김을 발휘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일 것이다.

특히, 길드라는 일종의 직인 조합은 직인들 간의 기술과 노하우를 공유하여 서로의 발전을 이끄는 역할도 하지만 공동의 이익에 대해서 같이 싸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현대의 노조와 같은 개념이다. 직종별로 똘똘 뭉친 이들을 무시할 수 있는 간 큰 영주나 국왕이 과연 어디 있을까. 게다가 각 직인들의 조합인 길드는 자신들의 이익과 번영에 충실하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벨기에가 지금의 번영을 누리는 데에는 이런 길드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 산 적은 없지만 왕의 집이라고 불리는 건물
브뤼셀 도시 권력의 상징, 시청사
황금빛으로 도금되어 화려해보이는 길드 하우스는 당시 벨기에 길드들의 번영을 잘 보여준다
기름을 만드는 장인들의 상징인 손수레 문이 길드 하우스에 새겨져 있다


그랑 플라스의 야경, 그리고 엄마


누군가의 밤은 타인들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던가. 밤에 본 그랑 플라스의 모습은 낮보다 화려했다. 색색의 조명들로 치장된 건물들은 낮에 보았던 모습들과는 전혀 달랐다. 모바일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에 올릴 예쁜 사진을 만드는 요소 중 거의 8할은 조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아닌 건물들도 이 조명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이 곳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여행 중 나의 근황을 가족에게 전하기 위하여 모바일 메신저로 그랑 플라스의 야경 사진을 전송했다. 가족들 모두 야경이 몹시 예쁘다며 감탄을 했지만 사실 다른 가족들보다 엄마의 반응이 가슴에 남았다. 내가 보낸 그랑 플라스의 야경 사진이 너무나 감명 깊으셨는지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까지 설정해놓으셨다. 몇 번이나 이 곳이 어디인지 물으며 엄마는 너무 예쁘다고 말하셨다.

이런 엄마의 모습이 소녀 같아 보여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찡했다. 너무 나 혼자만 좋은 곳에 많이 다녔던 것은 아닐까. 젊은 날의 엄마도 분명 좋은 곳을 많이 다니고 싶으셨을 텐데 나와 동생을 키우느라, 당시 시대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런 몇 가지의 어쩔 수 없는 이유들로 다니지 못하셨던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나에게 따뜻한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준 엄마이기에 나도 엄마에게 삶을 빛나게 해줄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고 싶었다. 머지않은 가까운 시일 내에 엄마와 함께 유럽 여행을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엄마가 여행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아직 있을 때.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성탄절이 아직 한달이나 남았지만 브뤼셀은 벌써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낮에 보았던 시청사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길드하우스가 밤의 귀부인 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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