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의 일에 대한 기록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군이 탄 헬기가 머리 위를 지나 여의도로 향하던 순간, 나는 자존심 상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두려움은 단지 헬기의 위압적인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달아 휘두르는 권력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창문을 열고 헬기 몇 대가 국회로 날아가는지 헤아려보는 것 외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권리와 자유가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체감하는 순간, 나의 존재는 무력했고, 무력한 만큼 두려움은 나를 압도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 밤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이 분노의 불씨는 효순·미선 사건 때, 세월호 참사 때, 이태원 참사 때도 저마다 다른 크기로 크고 작게 일렁였다. 그러나 사는 게 바빠지면 곧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사그라지는 정도였다.
이념을 걷어내고 나면 한없이 좋은 사람들이기에, 나는 주변과 껄끄러워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어떤 사안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일에 늘 신중하려고 노력했다. 상대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나는 그랬다. 물론 나조차 상황 따라 입장 따라 매번 같은 결론에 도달하진 못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요즘 이 책 집에 없는 사람이 없을 텐데, 소년이 온다를 겨우겨우 읽어낼 때도 비슷한 감정이 스쳤다. 작품 속 묘사의 수위는 지나치게 적나라해 견디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한강 작품은 늘 그렇지'하며 넘겨보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 이런 불편함도 필요하니까 그럴 테지.'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쩌면 노벨상의 권위가 어느 정도 인내심의 동력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책 속의 폭력과 억압은 너무도 생생해 눈으로 보는 듯했으니까,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고 다시 덮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책을 덮을 때마다 느꼈던 거북함은 낭만적으로 치부할 수 있는 지적 불편함에 불과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밤의 두려움은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다고 믿었던 나의 안일함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2024년에도 너무나 쉽게 재현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우리가 직면한 이 문제는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특정 이념 추구나 정쟁이 아니라, 권력이 개인의 자유와 평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대한 문제다.
사적 분노는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공적 권력으로 둔갑해 다른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순간, 번거롭고 귀찮아도 단호히 맞서야 한다. 나의 평온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나의 권리이며, 그것을 지키는 일은 와닿지 않았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거창한 일이 된다.
그런데도 불법적인 사적 분노를 제지하고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탄핵소추안 결의 움직임에 여전히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이들을 지금 이 시간에도 목도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 누구의 권리를 대리해 서 있는지, 서 있는 그 좁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반대하는 일이야 각자 입장의 일이라고 양보하더라도, 적어도 투표는 실행되어야만 한다. 자신의 번뇌와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장소자체를 이탈하는 일은 모두의 권리를 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편리하고 나약하며 비겁한 일이다.
이 글은 거창한 선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와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일상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권력이 결코 사적 감정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나 스스로에게도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불완전하고 두서없는 글로나마 며칠간 침묵했던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 무력함에 대한 토로를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