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넌덜머리 나는 런드리

빨래 의견서 - 잦은 빨래에 지친 옷들의 입장을 정리한 서면

by JuneK

드르륵 탁, 드르륵 탁.

드레스룸 불이 켜지고 옷걸이를 훑어대는 걸 보니 또 시작이다.

오늘은 제발 내 차례까지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쟤는 우울하면 자꾸 우리를 빨아대고 널어대고 치워대고 멀쩡하게 깨끗한, 입지도 않은 옷을 다시 괴롭히며 자꾸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잘못 걸리는 날엔, 결국 또 정신없이 끌려 들어간다. 오늘은 동행이 다소 적다. 지난번엔 침실에 사는 흐물한 이케아 누렁이녀석이 같이 들어와서 딱딱한 코로 자꾸 어깻죽지를 쳐대는 통에 아파서 혼났다. 늘 이 차갑고 어둑하며 거대한 동굴은 유쾌하지 않다. 쓱-탁. 이제 66분 동안 딱 죽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동굴 체험 거의 100회 차가 넘어가다 보니, 노하우가 생긴다. 물이 나오기 전에 되도록 가장 아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급수가 시작되면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가능한 한 온몸에 골고루 물을 적시는 것이 좋다. 이젠 머리를 비울 차례다.

우로 셋, 좌로 셋.

우로 셋셋, 좌로 셋셋.

잡념을 버리고, 내 형체도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고단함에 치댔던 보푸라기며, 묵은 때, 어디선가 스민 냄새, 어느새 윤기 없이 서걱거리는 살갗과 닿아 흩날리다 붙은 각질들 모두 털어 내다 보면 '너도 참 고생이 많다.' 하고 측은해지기도 하고 이내 또 씁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컨디셔너 풀어진 물에 헹궈질 때쯤이면 괴로움도 잊고 거품 욕조를 하는 것처럼 기분이 괜스레 들뜬다. 마치 호캉스라도 온 양 두근댄다. 즐거움도 잠시 차올랐던 물이 정신없이 빠져나가고 나면 굉음을 내며 내 영혼까지 쥐어짠다. 이 거대한 동굴이 정신없이 회전을 해 나를 혼미할 정도로 원의 바깥으로 밀어낸 뒤, 중력을 이용해 나를 바닥으로 내치려고 할 때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젖은 낙엽처럼 조용히 하지만 최대한 온전히 밀착하여 나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귀가 먹먹해 채 트이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슈베르트의 송어가 흘러나온다. 꿈결 같은 순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