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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지향적인 사람의 숙명

불면, 과거지향적 사람의 숙명

by JuneK

불면[不眠]

잠을 자지 못함

잠을 자지 아니함



불면의 사전적 의미가 재미있다. 한 단어 안에 자의, 타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니.


어릴 땐 잠이 몹쓸 적이었다. 어쩜 하루에 삼분의 일을 잘 수 있지? 이 불합리하고 연비도 한참 떨어지는 인체 구조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잠들기엔 보고 싶고 너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자야만 한다'는 현실이 너무 억울했다. 모든 것에 도전적이고 호기로웠던 당시의 나에게 잠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필요-악 必要惡으로 생각될 정도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수험생 시절에는 어른 흉내를 내며 맛도 없는 커피를 연신 마셔대며 잠을 이겨냈고, 그 승리감에 도취해 모두가 잠든 밤에 깨어 느끼는 고요가 좋았다. 늦은 새벽 AM 라디오는 나만 아는 맛집처럼 소중했다. 때로 잠은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주말 하루쯤 온통 잠으로 채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일요일 아침에 밥 먹으라는 엄마 외침에 '안 먹어!'라고 웅얼대며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 때의 그 행복은 잊히지 않는다.


몇 년 간 화두는 여전히 ‘잠’이었다. 특히 20년 여름에는 불면증으로 무척 고생했다. 잠들기 전 독주도 마셔보고 명상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처음 등산을 하기 시작했던 날도 하얗게 밤을 지새운 뒤였다. 위기를 느끼고 21년 봄부터 침대를 신중히 고르고, 방에는 자는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불면증을 겪기 전까지는 내일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지.' 잠에 미련이 없어 늘 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곤에 지쳐 자곤 했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반복되면서 비슷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일주일 두 번 정도는 놓치지 않고 운동하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억지로 자려고 스스로를 압박하지는 않았다. 카페인을 줄였고, 도움이 되는 아로마 향들을 구비했다. 스트레스 줄이기, 긴장을 없애기, 요가나 스트레칭하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며 급한 때에는 친구가 미국에서 구해다 준 멜라토닌을 몇 알 집어삼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주위가 고요해지면 습격해 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었다.

오래 괴로워하다 보니 괴로움의 저 아래에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서있는 내가 있다. 걸어온 길이 얼마나 삐뚤어졌는지 살피고 복기하고 후회하느라 흘러가는 '지금'은 또다시 놓치게 된다. 너무 많이 담아버린 서랍을 비우지 못한 채, 또 새 서랍을 늘릴 걱정뿐이다. 잠은 깨어있는 동안 담고 쓴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한 뇌에게 휴식 같은 시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꽤 오랜 시간 불면으로 정리할 기회는 갖지 못한 채, 수없이 많은 후회와 기억을 다시 저장할 뿐. 불면은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의 숙명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담기를 멈추고 수많은 서랍들에 차곡차곡 담긴 기억들을 털어내어 분리수거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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