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달콤한 향기에 취해 마음이 달 뜬 대학생 K 씨의 이야기
시네큐브에서 처음 본 영화는 리컨스트럭션이다. 사랑의 재구성이라는 부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 단어는 이때 단번에 외운뒤로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마도 후에 생각해 보니 대체로 겨울의 시네큐브는 깐느영화제 수상작 상영시즌이었던 것 같다. 조금 지나면 오스카 수상작을 해줬던 것 같고. 유독 이 날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 관람을 시도한 순간부터 끝까지가 너무 선명하고 강렬한 기억이기에 그렇다.
2005년 1월, 나는 이젠 퇴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꾸역꾸역 걸어와버린, 결국 걸어온 길의 끝에 서 결판을 내야 하는 지점에 서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고3 생활로 순순히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뿐이었던 씁쓸한 겨울을 지내고 있었고 그럴수록 나는 그 현실로부터 최대한 마음으로나마 도망치고 있었다. 그날 역시 엄마 처녀 시절, 월급 타 장만한 옷들을 엄마 옷장에서 뒤져 제법 몸에 맞아진 사이즈에 뿌듯해하며 코디를 했다. 베이지색 셔링 부츠와 체크무늬 네이비 롱 스커트, 돈피로 앞판을 만들고 팔부분은 뜨게 니트로 정리된 멋진 블루종을 입었다. (지금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그 옷들은 반도패션 옷들이었는데 지금 봐도 만듦새가 훌륭하다.) 광화문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내려 5회 차 영화를 볼 생각으로 흥국생명 지하로 내려갔다. 괜히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더 정확히는 몹시도 '어른의 행위'를 하는 느낌이었다. (팝콘이나 오징어를 먹는 영화관보다 더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티켓을 예매하던 부스 앞 풍경, 구두 소리가 뭉툭하게 흡수되던 카펫 바닥, 생경한 건물 내부의 약간은 차갑고 이국적인 인테리어, 메탈 소재의 벽체와 흑과 백이 무한히 반복되는 화장실 타일에 매료되어 괜히 바닥과 내 발을 찍어댔던 기억. 묘하게 공간이 주는 설렘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시네큐브는 공간이 주는 향수가 있다.) 영화가 끝나고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세종문화회관까지 뒤꿈치를 들고 널찍한 큰 판 타일의 줄을 밟지 않고 깡충 거리며 걸었다. 또각또각 살랑살랑 모든 걸음이 다 어른의 일이었다. 지금은 T와 F가 보더라인으로 불분명 해졌지만 저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완벽하게 F재질의 인간이었음을 실감한다. 그 시절 그 소녀의 무한한 공상은 나를 어디로든 데려갔다. 걸으며 꿈꾸고 또 생각에 잠기길 좋아하는 소녀였다. 이렇게 꿈꾸며 최대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몸부림 속에 마음에 꿈의 씨앗을 심었던 것 같다. 영화 미술을 하고 싶다. 나를 달 뜨게 하는 이것들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경험은 대학 때도 있었다. 학부 시절 최대 관심사는 '청담동'이었다. 몇 번 단체 미팅이다 뭐다 들락거린 북적대고 정신없는 강남역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높고도 고요한 빌딩들이 늘어서 있고 인간 보폭의 스케일과 관계없이 자동차 중심으로 계획된, 꽤나 부담스러운 강남의 보도블록. 여기부터 저기까지 통창으로 도배된 쇼윈도들. 그 안에 왠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거리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디스플레이된 가방과 금은보화들. 유독 들어가고 싶었던 매장은 이국적인 패턴의 스카프(그땐 벽지라고 생각했다)가 걸린 오렌지빛 에르메스 매장이었다. 그때의 나는 에르메스를 헤르메스로 읽던 시절이다. 그저 화려한 패턴 안에 재미있는 일러스트들과 오렌지 컬러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나는 저벅저벅 걸어 매장으로 들어갔다. 나를 향해 뭔가 채 묻기도 전에 준비된 멘트를 발사했다.
"그냥 좀, 둘러보려고요." (나한테 제발 말 걸지 마.라는 외침이었다.)
(그냥 좀 둘러보겠으니 나를 내버려둬-라는) 나를 천천히 따라다니며 편히 보라고 미소를 짓던 매니저는 내가 발길을 멈춰 눈빛을 보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진심을 다해 설명했다. 그리스 신화 얘기도 했다. 얼마나 재밌는 스토리가 많은 브랜드인지, 승마 용품들은 얼마나 다양한지. 나 역시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그녀에게 화답하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경청했다. 위층, 아래층을 오가며 가구나 그림 얘기도 보태주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대화 중간중간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있으며 서른이 되기 전에 영화미술 감독이 되는 게 꿈이라는 말도 했다. 지금 VMD 수업을 듣고 있고, 그러니까 더욱 이런 걸 더 많이 보고 싶다고도 했다. 매장을 샅샅이 보고 나오는 나를 배웅하며 그녀는 "또 언제든 구경 오세요."라는 말을 남겨주었다. 얕은 긴장과 설렘, 과한 친절에 취해 매장을 나설 때쯤엔 안면 근육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 같다. 뭐야 이 멋진 브랜드 설레네. 하며 달 뜬 마음과, 자본주의 향기에 취해 맛도 모르는 다크초콜릿을 입에 물고 도산 공원을 뱅글뱅글 돌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멋진 첫 경험 덕분에, 얄팍한 지갑사정의 사회 초년생이 되어서도 틈만 나면 궁금한 브랜드들의 매장에 꼭 저런 학습자의 에티튜드로 제법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의 친절이 심어준 용기의 씨앗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씨앗 덕분에 밥 벌어먹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해도 될 만큼.
지금이야 워낙 자유롭게 젊은 층들도 명품을 다양한 형태로 소비하고 즐기니 이런 경직된 일화는 좀 웃길 수도 있겠다. 남의 집 인테리어를 원한다면 언제든 볼 수 있고 패션 플랫폼 사용은 일상이 된, 북유럽 가구디자인 전시 같은 걸 배경 삼아 내 셀카를 찍어 올리는 놀이의 개념으로 브랜드를 경험하는 지금 세대가 만들 세상은 더 감각적이겠지. 뭐든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건 좋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진리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