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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Sep 10. 2023

눈물 젖은 쑥떡

동기가 쥐어 준 쑥떡을 먹으며 울었다.

 나는 한 때 다시 살기 위한 동력을 찾기 위해 절박했다.


그동안 못해주고 일만 시켜 먹던 일을 한 번에 갚으려다 보니 돈밖에 방법이 없었다. '어디 다 떨어질 때까지 벌어둔 돈을 다 써보자.' 하고 여행을 떠났다. 오픈리턴 티켓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비쌌다. 당시 유일하게 마음 둘 곳으로 도망쳐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코로나여도 막을 자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팬데믹 시절의 출국은 대학병원을 몇 번씩 가고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동양인이면 일단 눈을 흘기던 그곳에서도 활개를 치며 쏘다녔다. 그저 흥청망청 먹고 싶은 건 먹고 사고 싶은 건 샀다. 보고 싶은 건 다 봤다.


'그렇게 고생만 한 내가 이깟것쯤 못살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하는 마음이었다.


돌아보면 참 애달픈 마음이다.


 평생 시야를 가려놓고 쉬기는커녕 앞만 보고 달리라고 채찍질할 땐 언제고 갑자기 다 죽을 때쯤 되니까 밑도 끝도 없이 허용적이 된 일관성 없는 부모처럼 굴었다.


 요가를 대하는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되지 않는 자세를 완성하기 위해 어금니가 부서져라 바들바들 근육 경련이 일도록 반복했고, 집에 오면 후굴 각을 만들려고 밥도 굶고 요가링을 척추 뒤쪽으로 끼워놓고 30분씩 늘려줬다. 가부좌가 불편한쪽으로 짜놓고 요가스트랩을 매어놓은 채 발바닥이 하얘지도록 놔주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뭐가 문젠지 몰랐다. 그저 압구정은 너무 머니까 동네 요가원 한 군데를 더 다니고 싶었을 뿐.

문제를 문제로 느낀 건 동네 요가원에서 RYT200을 수료하고 난 후인지도 모르겠다.


 500 심화과정을 하고 있는 지금과 비교해 보면 200 과정을 공부하던 때가 훨씬 더 절박했다.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손을 뻗은 채 정신없이 따라갔다.


이때도 나는 나를 적극적으로 굶겨 살을 뺐고, 잠을 줄여 웨이트를 시켰다. 말라갈 때마다 거울에 비친 나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잠시 잠깐의 칭찬,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여기서 만족하지 마. 아직이야."


나쁜 년, 과연 천하제일의 나쁜 년이다. 너 하고 싶은 거 다하라며 양껏 양키음식을 먹여놓고 또 채찍질을 하며 한 끼 반주먹으로 굶긴다. 악독한 년.


 200 과정은 점심시간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하루 반나절 이상 진행되었다. 주로 점심은 도시락을 싸와서 음식명상을 했다. 기존 감정적 허기를 손쉽게 채우는 용도로 썼던 음식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육에 들어가면 식욕 억제가 굉장히 편안하다. 지금도 감정적 식욕이 올라오면 나가 걸으며 명상을 한다.


 식사 후에 음식 명상에 대한 소회를 나누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변화를 알아채고 또 마음과 생각을 나눴다. 나는 한 끼 한주먹의 저열량 식단을 진행하던 때라 한창 머릿속으로 탄수화물 가득 들어있는 떡볶이와 맘모스빵을 탐하던 때였다. 수련 동기 중 E는 엄마 또래의 나이에 체구가 아담하고 귀여운 분이었는데 그때마다 그걸 먹어가지고 되겠냐는 걱정을 해주셨다.


 어느 날엔가, 동기 E가 검푸른 색의 쑥떡 몇 덩이를 가져와 나눠주셨다.


보자마자 알아봤다.

'아 저거 딱 할머니 개떡 색인데.'


친할머니가 매년 봄께에 쪄 보내준 개떡은 냉동실에 늘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손으로 누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아주 볼품없이 못생긴 떡이었는데, 구워보면 이건 떡이 아니고 쑥 덩어리였다. 쑥이 그만큼 징그럽게 많이 들어있었고 할매 입맛이었던 나는, 할머니는 미워도 할머니의 개떡은 참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색의 쑥덩어리떡을 또 만나게 되다니. 역시 추억과 음식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렌지에 무성의하게 데워내면 접시 바닥에 눌어붙은 떡을 포크로 돌돌 말아서 벗겨 먹었지. 그녀의 쑥떡 역시 화색을 하며 반겼기에, 기억에 담아두었다가 늘 쑥떡을 기회가 되면 한두덩이 챙겨주셨댔다. 그렇게 챙겨 온 쑥떡은 단 한 번도 버리는 일이 없이 매번 가방에 소중히 챙겨 와 데워먹기도 하고, 떡볶이를 참을 수 없을 땐 같이 들은 밀떡은 버리고 가져온 쑥떡을 편으로 썰어서 떡볶이를 해먹기도 했다. 떡이 너무 맛있다며 방앗간 번호를 알려달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가 한두 개씩 부러 챙겨주던 떡이 좋았을 뿐이다. 언젠가 뽁뽁이에 싼 얼린 쑥떡 한아름을 주셨을 땐 그 고마움에 아껴아껴 마지막 한 덩이까지 소중히 먹었다. 그녀의 떡은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오늘 성실함 그 자체인 나의 동기 E는 나와 함께 시작한 교육을 모범적인 코스로 수료해 버리셨다. 요가원 티테이블에 평소보다 몇 갑절은 큰 쑥떡이 놓여있었는데, 역시나 그녀의 마음이었다. 주변을 살피지 못해 알아채지 못했는데, 살며시 내게 다가와 "쑥떡 좋아하잖아~ 얼른 챙겨다 먹어요-" 해주셨다. 부리나케 나갔더니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한 덩이가 남아있어 챙겨 올 수 있었다. 집에 와 저녁 대신 주신 쑥덩어리떡을 잠깐 쪘다. 과연 쑥덩어리떡이다. 한 덩이라도 먹이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와앙 입을 벌려 한 입 먹으려는데 왜 주책맞게 눈물이 나는지.

 

 뭘 배웠는지 과정 내내 가방만 들고 다닌 것 같다고 소회를 밝힌 그녀는, 온갖 주변에 정과 마음을 나눠주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그녀가 있어 덜 힘들었던 것 같다. 혼자 골똘하고 괴로워할 때도 그저 곁에 있는 것 자체로 좋았다. 역시 난 자리가 큰 법이다. 물론 뭐 영영 이별은 아니니 이 글과 오늘의 눈물 젖은 쑥떡은 다소 오바육바일지 모른다.


 사실 결혼에 별 뜻이 없는 내가 혹 결혼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엄마가 내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정말 최고로 키워주고 싶다는 마음을 한동안 품고 있었다. 생각정리가 많이 된 지금은 그런 어리석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가끔 배추흰나비로 오고 또 쑥떡으로도 오고 가을바람으로도 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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