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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 N Feb 18. 2021

2021.02.18. 오후 2시

워라밸이란게 뭘까 

'본인이 생각하는 워라밸은 무엇인지 주어진 30분 동안 정리하여 발표하시오.'


2017년 겨울,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업계 최고라 불리는 모 기업의 2차 면접 주제는 워라밸이었다. 전공 지식과 시사 상식을 바탕으로 해결하는 고난도 문제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상식적인 수준'의 면접 질문에 난 적지 않게 당황했다. 너무 뻔한 답이 나올 거란 예상에 PT면접은 쉬어가는 단계란 생각마저 들었고, 난 이 쉬운 문제에서 남들보다 변별력을 가지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좀 더 창의적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제가 생각하는 워라밸은 근무시간에는 최대한 집중해서 일을 마치고, 그 이후의 시간에는 내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하는 것과 쇼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가 생활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제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합니다. 이를 통해 저는 좋은 컨디션으로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하고 업무 이외의 시간에는 업무로 스트레스받지 않고자 합니다. 일과 삶이 분리되고, 좋은 삶을 유지하는 것이 곧 업무의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마른 체형과 창백한 피부 톤 때문에 체력이 약해 보이는 이미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난 운동을 강조했다. 당시 거의 매일 헬스장을 갔고 러닝머신 위에서 달릴 때면 실험실에서 받은 스트레소를 많이 잊을 수 있었다. 또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고 달성하면 사고 싶었던 물건을 하나씩 사는 게 낙이었다. 대답을 꽤 잘했다고 믿었다. 나의 건강함을 부각함과 동시에 워라밸과 회사의 생산성을 잘 연결시켰다. 


자신 있던 내 대답과 달리 내 첫 직장생활은 워라밸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정규 퇴근시간은 오후 5시였고 일이 익숙하지 않던 초창기에는 밤 9시가 정도까지 야근을 했던 적도 종종 있지만 2년 차부터는 대체로 5시 반~6시면 퇴근을 하곤 했다. 월급을 받는 날이면 친한 회사 동기들과 예쁘고 비싼 식당에 가곤 했고 학생 때보다 늘어난 수입만큼 쇼핑하는 일도 잦아졌다. 한동안은 개인 트레이닝을 받으며 꾸준히 운동했다. 업무시간에는 일에 집중 그리고 업무 이후에는 여가 생활이라는 나의 완벽한 워라밸 논리 속에 내 진짜 워라밸은 없었다. 


퇴근 후에도 나는 계속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무도 나를 찾는 이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 회사를 생각했다. 회사 동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고 매번 저항하지 못하고 모든 걸 견뎌내야만 했던 나 자신이 비참했다. 하기 싫은 업무가 있으면 몇 날 며칠을 밤잠을 설쳐가며 괴로워했다.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면 기분을 감추고 웃으며 대화하는 게 점차 힘들어졌다. 나는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지만 간혹 내가 무심코 지나친 몇몇 이들은 나의 노력을 몰라주었다.


업무가 맞지 않는 탓이었다. 그저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졸업을 하면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난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큰 고민 없이 인지도 있고 집에서 가깝고 연봉도 괜찮은 회사를 선택했고, 난 일하는 게 재미없었다. 그저 익숙한 일만을 하고 싶었다. 나름 친화력 좋고 사람 만나길 좋아한다 믿었건만 매일매일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실험실과 자리를 왔다 갔다 뛰어다니고 서있을 만큼의 체력 또한 뒷받침되지 않았다. 


오로지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난 첫 직장에서 꾸역꾸역 경력 3년을 꼬박 채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건강한 삶이 충족되어야 일을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에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내 삶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최소한 하루의 1/3을 회사에서 보내고, 나의 직장 동료들은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자아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꽤 즐거워야 하고 열심히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만 한다. 내가 취업 전 가지고 있던 일과 삶의 분리라는 워라밸 철학이 잘 맞는 이들도 분명 많이 있겠지만, 적어도 난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온전히 날려버리고 내 삶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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