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 해먹어요.
4월의 어느날.
퇴근길,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
확실히 해가 다시 길어졌다.
집에 가는 버스에 실은 몸은 지쳤지만, 괜히 하루가 조금 더 늘어난 거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10평 남짓의 방 한칸, 나의 방공호에 도착하자마자 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한다.
멀리 져가는 햇빛에 노르스름하게 물든 나의 작은 방안이 따스하다고 느껴졌다.
그 빛에 왠지 오래오래 겨울일 것만 같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이 기어이 왔구나 싶었다.
내가 이 집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건너편에 큰 벚꽃나무가 보인다는 것.
그 풍경이 너무 어여뻐, 아직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운한 마음이 든다.
한참을 그 풍경에 발길을 붙잡혔다.
벚꽃은 매년 늘 시련이 참 깊구나.
애써 피워낸 그 예쁜 것들이 찬바람과 비에 다 떨어져 버릴까 나는 늘 애가 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또 매년 벚꽃은 그 시간을 잘 이겨내고 더 실해져, 끝끝내 흩날려 우리에게 낭만을 선사하곤 했지.
벚꽃은 지나온 해의 짐을 다 떨구고 또 다른 한 해가 시작되는, 나에게는 일종의 팡파레와 같은 거였다.
그렇게 어여쁜 것들로 치장을 하는 주변의 풍경과 달리, 나는 이상하게도 봄이 되면 만사가 귀찮아졌다.
씻는 것도, 꾸미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심지어는 먹는 것도.
움직이는 모든 일들에 말이다.
그래도 뭐라도 간단히 먹어야 한다.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한 번 길에서 그냥 쓰러져버린 적이 있다.
일 때문에 무척 바빠 며칠을 꼬박 세우던 때 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불규칙한 식습관에 먹어도 편의점에서 대충 떼우기 일수였을 때였다.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고, 수액을 다 맞고 약 처방을 받은 뒤 퇴원을 했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나 스스로를 잘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뒤로는 밖에서 약속이 있는 게 아니라면 집에서 끼니를 꼭 챙겨 먹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해먹다보니 나를 위한 요리라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깨달았다.
... 뭐 먹지?
옷도 벗지 않고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간단하게를 떠올리면 몇 가지가 떠올려 본다.
아, 그중 제일 빠르게 해먹을 수 있는 건 간장국수이다.
삶의 무기력함 속에서도 내가 택하는 최소한의 위로, <간장 국수>
간장국수는 별다른 재료가 없어도 좋다.
국수와 간장, 그리고 설탕만 있으면 해먹을 수 있는 최고로 간편한 요리.
팔팔 끓는 물에 500원 짜리만큼 국수를 넣고 바닥에 붙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준다.
예상보다 빠르게 끓어올라 넘치면 날벼락이니, 찬물 한 컵 떠놓고 대기하고 있는 건 무조건이다.
그렇게 3분간 삶아준다.
그 사이에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어 구멍이 너무 작지 않은 채반에 놓고 찬물에 씻겨 백김치를 만들어준다. 고춧가루를 다 씻어내고 물기를 꼬옥 짜서 그릇에 준비해둔다.
이 백김치는 참기름이나 들기름과 만나면 최고의 감칠맛을 더 해준다.
요리가 시작되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면, 그 순간만큼은 부엌이 작은 온실처럼 따뜻해진다.
잘 삶아진 소면은 찬물에 있는 힘껏 빡빡 헹궈 탱글 하게 식힌다.
물기를 꼬옥 짜줄 때 되직한 느낌이 없어질 때까지 나는 아주 빡빡 헹군다.
깊은 유리그릇에 면을 넣고 수저로 간장 두 숟가락, 참기름 한 숟가락, 설탕 한 숟가락 휘리릭 부어주고 설탕이 잘 녹아들도록 비닐장갑으로 잘 비벼 찬장에서 꺼낸 김가루를 탈탈 털어 올리면 끝.
접시에 잘 비벼진 면을 올리고 그 위로 남은 양념을 쪼로록. 아까 준비해 둔 백김치를 올리고 통깨를 뿌린다.
때로는 파 송송, 청양고추 송송, 계란지단이나 반숙 달걀프라이를 얹기도 하지만, 없어도 괜찮다.
단출해도 충분히 맛있다.
후루룩-
첫 입에 바로 미소가 퍼진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단순한 거 같지만 자꾸 땡기는 바로 이 맛.
어릴 적 입맛 없을 때, 갑자기 출출해질 때면 엄마가 자주 해주던 것도 바로 이 간장국수였다.
그때는 그저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쯤으로만 여겼는데, 지금은 그 맛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벚꽃이 화려하게 흩날리는 계절, 나는 그 모든 빛과 색을 다 품지 못하는 거 같아 조금 무기력해지지만,
이 간장국수 한 그릇 앞에서는 그저 소박하지만 힘이 있는 행복을 누린다.
금세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운다.
그렇게 왠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