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 해먹어요.
5월의 어느 날.
봄을 타던 친구의 기세에, 봄기운에, 아무튼 그런 것들에 밀려 나가듯 나간 소개팅.
그곳에서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 기훈을 만났다.
자기 남자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두 살이 많고, 지하철을 안 갈아타도 갈 수 있는 역 근처에 사는 건실한 남자라는 게 주선자의 설명이었고.
나보다 피부가 하얀 남자가 하얀색 상의를 입고 나와 유독 빛이 나 보였다는 건 나의 첫인상이었고.
웃는 게 참 선한 남자가 예의도 바르고, 말도 예쁘게 하고,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같고, 그 영화의 감상 포인트가 같고, 무엇보다 사람이 좀 고지식한 게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든 이유였다.
처음 만난 날, 그날 우리는 점심부터 저녁까지 거의 10시간을 쉬지 않고 대화했다.
다음날 출근하는 날인데도.
알고지낸 지 한달쯤 되었을까. 내가 먼저 고백했지만, 자기도 그날 고백하려고 했다고 했으니, 기왕이면 내가 고백받은 걸로 하기로 상호 간의 합의를 봤다. 그리고 유독 날이 좋다고 예보된 봄날, 우리는 한강에서 첫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주말, 한강 피크닉이라고 하니 괜히 뭘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뭘 시켜 먹을 거 같긴 하다만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라도 사갈까 하다가, 그래도 첫 데이트인데 좀 더 정성을 들여야 할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도시락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김밥’을 직접 싸기로 했다.
"무슨 김밥을 싸야 하나...."
문득 엄마 옆에서 김밥 싸는 걸 구경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의 김밥들은 참 기발했다.
편식했던 남동생을 위한 어묵과 햄만 들어간, 칼로 썰면 하얗고 노란 단면에 햄 두 개가 뿅뿅하고 보이는 게 이름하여 돼지코 김밥.
두툼한 치즈계란말이가 통째로 들어간 김밥.
참치김밥인데 들기름에 볶은 묵은지가 들어있어 새콤하면서도 고소했던 김밥.
이렇게나 다양하고 맛있는 김밥을 쌀 수 있다니, 그때는 엄마의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엄마가 꼭 마법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밥 마법사라....
봄이면 봄나물을 활용한 김밥을 싸주셨는데, 특히 미나리 김밥이 우리 엄마의 그야말로 최애 김밥이었다.
달달한 간장에 볶아낸 다진 소고기와 데쳐서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한 미나리가 들어가는 김밥이었다.
그래, 이거다 싶었다.
봄의 피크닉과 잘 어울리는 설렘 가득한, <미나리 김밥>
보통은 배송으로 장을 보는데, 미나리를 직접 골라 사고 싶어서 오랜만에 마트를 갔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그 사이 미나리를 손질했다.
“입에 잘 맞아야 할 텐데.”
시금치나 오이처럼 익숙한 채소도 아닌데, 괜히 생소하면 어쩌나 싶었다.
다진 소고기를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볶아 수분을 충분히 날려준다.
수분이 어느 정도 날라가면 1:1의 비율로 설탕과 간장으로 달콤 짭짤하게 간을 베이게 한다.
설탕을 한 수저 먼저 넣어 볶다가, 간장 두 수저를 팬에 태우듯 볶아서 불맛을 살짝 입혀준다.
고기만 볶았을 뿐인데 맛있는 냄새가 집을 꽉 채운다. 볶은 고기는 접시에 덜어 식게 둔다.
당근을 길고 얇게 채 썰어 프라이팬에 살짝 볶고 마찬가지로 접시에 덜어 식게 둔다.
달걀은 한 알이나 두 알을 쓰면 되는데, 오늘은 두알. 흰자와 노른자를 잘 섞은 계란물도 프라이팬에 부어 얇은 계란말이도 준비한다.
계란말이도 조금 식혀준 뒤에 긴 모양으로 잘 썰어준다.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섞어 김 위에 얇게 편다.
준비한 재료들을 가지런히 올린 뒤 마지막으로 간장만으로 아주 약하게 간을 한 미나리를 얹는다.
김밥 속에 자리 잡은 미나리가 봄빛 같다.
김밥 발로 꾹꾹 눌러 말아낸 김밥을 썰자, 참기름 냄새와 미나리 향이 향긋하게 피어오른다.
도시락에 예쁘게 담고 위에 참깨를 톡톡 털어준다.
다이어트한다고 회사에 종종 도시락을 싸가곤 했는데, 이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싸본 게 얼마 만인지. 모든 게 다 귀찮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지금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연애 감정이라는게, 사랑이란 게 참 신기하지.
그렇게 김밥이 가득찬 도시락 하나, 방울토마토로 채운 도시락 하나.
나무젓가락까지 넣어 보자기로 잘 둘러매면 소풍 가는 느낌 제대로 난다.
코끝이 간질간질해도 좋은 날이 있다.
꽃가루가 공기 가득 떠다니는 계절, 눈이 빨개지고 재채기를 참을 수 없어도 괜찮다.
이 도시락을 보고 얼마나 해사한 미소를 지어줄지 온 신경은 다 그것에 쏠려있었다.
멀리서 그가 보인다. 참 신기하지. 이제 내 사람이라고 이 많은 인파 속에서 바로 찾아진다는 게.
조금이라도 빨리 닿고 싶어 속도를 내어 걷다 결국 뛰게 된다.
"뛰지 마~ 다쳐~"
그에게 닿은 순간 내 얼굴에 확 하고 엎어지듯 들어온 꽃다발.
첫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준비한 꽃다발에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에_취!!!" 재채기를 내뱉었다.
그날 나는 눈물 콧물 다 흘려 나중에 찍은 사진을 보니 화장은 다 무너져있었지만, 꽃다발은 꼭 옆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 재료 중 하나가 미나리라는 사실에 이 사람이랑 결혼까지 하는 상상까지 했다는 건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