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 해먹어요.
6월의 어느 날.
올여름은 유독 빠르게, 유독 뜨겁게 시작되었다.
웅- 웅-
10평 남짓의 집에 선풍기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울린다.
띵동-
오랜만에 친구가 놀러 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십 년이 훌쩍 넘도록 알고 지낸 사이라 서로의 역사는 그게 흑역사이든 뭐든 다 알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녀석이다.
그녀의 선물은 초당옥수수.
깨끗하게 씻어서 물기를 닦아준 뒤 그대로 앉은자리에서 하나씩 들고 먹는다.
사각, 사각, 아삭한 식감과 함께 입안에서 퍼지는 달콤한 초당옥수수.
겨울에는 쫀득하게 씹히는 찐 찰옥수수가 별미라면, 역시 여름의 맛은 당도 높은 초당옥수수다.
초당옥수수를 하나씩 해치우고는 둘이서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도저히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는 날씨라며,
이제는 어디에 몸을 기대거나 뉘이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었다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하며 어떻게든 누울 이유를 찾는 우리였다.
요즘 연애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부모님 댁에 다녀왔는데 몇 킬로가 쪄서 돌아왔는지, 직장에 상사 아무개가 얼마나 얍삽하게 구는지, 집 근처에 새로운 빵집이 생겼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등등.
대화 사이사이의 정적을 즐기며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게슴츠레한 눈으로 수다를 떤다.
그러다 친구가 문득 말했다. 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너무 덥고 습하니까 몸이 지쳐서 마음까지 지친 거일수도 있지만, 퇴사를 해야할 거 같다고.
왜 다들 그런 순간이 있지 않냐며.
"걷는 방법을 갑자기 까먹는 순간, 맨날 아무렇지 않게 쓰던 단어가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맞나 싶은 순간, 눈 깜빡이는 게 갑자기 신경 쓰이는 순간 같은 거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것들이 이상하게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 요즘이 딱 그런 순간인 거 같아.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갑자기 너무 두려워졌어."
인생은 마치 거대한 롤러코스터 같다.
올라갈 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지고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교차되지만, 결국 내려가는 건 한순간이니까.
뭐든 결정을 내리면 의외로 단순하게 결론이 난다.
그것이 덥고 지치게 만드는 계절 탓인지, 아닌지. 우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결과이든 그것을 좋게 만드는 힘만 있으면 된다.
"아, 열심히 살기 싫다. 애쓰고 싶지 않다. 기 쓰고 싶지 않다. 그냥 살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를 충족시켜 줄 무언가가 하늘에서 그냥 뚝. 그럴리는 절대로 없겠지?"
"절대로 없지." 하고는, 로또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지 얘기하며 키득거리는 우리였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지치는 여름날엔, 시원하고 달달한 걸 먹어줘야 하는데.
그럼 아무리 생각해도 시원한 수박화채 밖에 없다.
나태한 여름날에 기분전환에 이만한 게 없다 싶은, <수박화채>
반은 깍둑썰기로 썰어놓고, 반은 화채 해 먹으려고 일부러 통으로 남겨둔 수박이 있다.
시원해진 수박 반통을 꺼내어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동글동글하게 속을 파내어 다른 그릇에 담는다.
수박의 빨간 과육이 국자에 담길 때마다 쨍한 여름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과육의 설탕 결정 같은 겉표면이 보기만 해도 탐스러워 친구랑 몇 개 집어 먹는데, 시원한 게 이빨이 다 시리다.
어느 정도 잘 파냈으면 그릇에 담아둔 수박 과육을 다시 수박 통 속으로 부어준다.
그리고 그 위로 암바사를 넘치지 않게 붓는다.
샤- 하고 퍼지는 시원한 소리. 녹아버리면 너무 밍밍해지니 얼음은 적당히.
국자만큼이나 큰 수저 두 개와 각자 덜어 먹을 귀여운 꽃무늬 깊은 그릇을 세팅해 주면 먹을 준비 끝이다.
한입 후루룩, 부드러우면서 톡 쏘는 시원함에 소름이 쫙 돋는다.
두들겨 보면서, 꼭지며 수박줄무늬 색이며 신중하게 잘 골라온 덕에 설탕이나 연유 없이도 충분히 달달하다.
기분 좋은 달달함이 온몸에 퍼지니 복잡했던 머리도 한결 가벼워지는 건 기분 탓일까.
둘이서 말없이 수박화채 반통을 바닥이 보이게 먹어 치웠다.
"아니 우리 배고팠나 봐."
수박 반 통을 순식간에 다 먹어버린 게 머쓱해 한참을 웃었다.
"찬찬히 잘 고민해 봐.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세상에 정답은 없잖아. 선택만 있을 뿐이지. 다 모르겠고, 어디서 무얼 하든 우린 행복해야 해. 마땅히."
친구는 행복하다고 했다. 내가 만들어준 수박화채 덕분에.
이렇게나 단순한 인간들이라는 것에 우리는 또 한참을 웃었다.
역시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수박 반 통, 그리고 친구와의 웃음이면 충분했다.
어떤 결과이든 그것을 좋게 만드는 힘은 역시 이런 것들로부터 비롯되는구나.
그리고 그 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든 계속해서 잘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