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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Aug 26. 2021

스물다섯, 제주도

00. 제주도는 '이제 당분간 나의 터전' 이다.

이 만큼 이뤄어놨으니, 또 이 정도는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다른 사람들은 이만큼 사니, 나도 이 정도는 살아줘야 한다는 부담감.

늘 해오던 게 있으니, 적어도 그만큼의 결과물은 내야 한다는 부담감.

그 모든 부담감이 제주의 아름다운 색감과 소리에 녹아버렸다. 

집 바로 앞 삼양해수욕장에서 보는 노을.

대학교 막학기에는 내가 늘 그래왔듯이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게 더 나아지는 게 맞나 싶은 의문은 내 자존감을 야곰야곰 갉아먹었고, 나한테 더 나은 삶은 대체 어떤 삶인가 하는 의문은 내 목표와 방향성 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생각이 많은 성격은 정말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또 하며, 

그렇게 점점 빨라지던 내 조급함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다 까맣게 타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내 마음에 품이라는 게 생겼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마음의 풍요를 느끼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만들어낸 넉넉한 품이었다. 내 자신에게 왜 그렇게밖에 못했냐는 질타가 아니라, 수고했다며 스스로를 토닥여 줄 수 있는 품 말이다.


그리고 그 품이 생기니. 숨이 쉬어졌다.

숨을 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나니,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에 오기 전 혼자 한강에서 따릉이를 타며 생각 정리를 하던 때.

사실 나는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 잠깐이라고 하더라도 제주도로 아예 거처를 옮긴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제주도는 내가 스물 한 살, 서울에서 계속 사시던 부모님이 큰 결심을 안고 이주한 곳이다. 


나에게 제주도는 중학생 때 다녀간 수학여행지이자, 부모님이 사시는 곳이자, 배송비도 물가도 비싼 생각보다 시골이네 싶은 섬. 그래도 특유의 느림과 여유로움이 마술과도 같은 섬. 딱 그정도였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그 중심을 살아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믿었던 나이 스물다섯.

이 시점에 부모님의 터전인 제주도에 내려가는 것 자체가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도태되고 뒤처지게 되는 것 같아 망설였던 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막연한 불암감을 가지고 제주도에 내려온 지도 벌써 6개월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나에게 "너 정말 바보 같은 고민을 했구나." 라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제주도 유명 관광지에 위치한 카페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가, 내가 쓰고 싶었던 드라마 습작도 했다가, 만능 자소서와 포트폴리오도 만드는 중이고, 한참 미숙하지만 일상을 기록하는 영상이나 사진 콘텐츠들을 만들기도 하고, 베이킹이랑 요리도 하고, 훌쩍 버스 타고 제주 여행을 하기도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나름 알찬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집에서 보이는 제주바다

작년 코시국 나의 일상은 겉으로는 정신없이 바빠 보이나 그 속은 텅 빈 나날들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물론 여전히 코시국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롭고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 속이 아주 꽉 차 있는 의미 있는 나날들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점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서울과 좀 떨어져서 서울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일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제주도에서 지내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눠보고, 또 여유시간에 다큐멘터리나 영화, 토크쇼 등을 보면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형태는 참 다양하다는 걸 새삼 강하게 느끼는 중이다.


같은 동 시간대에 누군가는 도심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서 서 있기도 하고, 누군가는 관광지에서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는 자연 속에서 자신의 수확물을 키우고, 누군가는 전쟁과 테러의 최전방에서 취재를 하고, 누군가는 산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중임은 다르지 않다. 살아있다.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 그 삶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을 꾸준히 찾아아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없구나.

그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쓴 답에 동그라미 치면 되는 거구나. 뭐든, 역시 생각하기 나름이구나.


뭐 그런 생각들에 내 삶의 선택지에 대한 폭이 많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는 요즘이다. 이미 많은 선택지들이 있었음에도 정답을 찾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고민했지만, 그 끝에 와서야 인생에 정답은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참 꾸준히 깨닫고, 또 꾸준히 다시 잊어버리는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ㅎ)


집 앞 해수욕장 산책로

그렇게 스물 다섯, 작년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한 일이지만,

제주도에서 한 번 살아가볼까 하는 꿈을 키워나가는 중이다.


성인이 되면서 깨달은 가장 큰 사실 하나는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사라진다는 사실인데, 내가 아무리 예측하고 계획한다 하더라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직 제주도에 오래오래 살겠다는 말은 못하겠고..., 


제주도에 살아보겠다는 꿈을 키워나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직은 너무나도 막연하지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또, 내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들이 모두 제주에 있기에 나는 올 겨울을 제주도에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스물 다섯, 나는 제주도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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