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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Mar 06. 2022

( 게으름 )에 대한 기록

게으름에 대하여


철학가이자 정신적 스승이자 명상가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게으름이 어떻다는 것인가>를 읽었다.

게으름이 어떻다는 것인가.
그저 가만히 앉아 먼 곳의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는 것에 귀 기울이는 일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또는 아침에 자리에 누운 채로 근처 나무의 새를 관찰하거나,
다른 잎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춤추며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 무엇이 문제인가.

게으른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게으름을 나무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게으름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만약 당신이 건강한데 일정 시간이 지나서도 침대에 누워있으면
어떤 이들은 당신을 게으르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기운이 없거나 다른 건강상의 이유로
놀거나 공부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어떤 이들은 게으르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그 자신의 반응,
그 자신의 미묘한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런 마음은 게으르고 무지하다.
당신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많은 책을 읽지 못해 정보에 밝지 못한 것
그것이 무지가 아니다.

​무지는 자신에 대한 앎이 없는 것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동기와 반응이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잠들어 있을 때 게으름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이 잠들어 있다.
그들은 지식에 경전에 혹은 다른 누군가가 한 말에 갇혀 있다.
그들은 사상을 따르고 계율을 실천하기 때문에
풍요롭고 충만하고 강처럼 흘러넘쳐야 할 마음이 좁고 무디고 지쳐있다.
그런 마음이 게으름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정말로 게으른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당신이 게으르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그냥 받아들이지 마라.

​무엇이 게으름인지 스스로 알아내라.
그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모방하는 사람
두려움 때문에 작은 틀을 파서 자신을 가두는 사람
그런 사람은 게으르며
따라서 그 마음은 시들고 허물어진다.

​그러나 주시하며 깨어 있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다.
자주 조용히 앉아
나무, 새 , 사람, 별, 고요한 강을
바라본다 해도.

​​​​​

​​그 시를 읽은 류시화 시인의 서평을 읽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1년에 적어도 서너 달간 ‘게으름 피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누군가 게으름이라 하는 것을 누군가는 깨어있음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어리석다 단정한 것을 누군가는 앎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주저한다고 보이는 것이 누군가는 마음의 중심에 다가가는 일이다.

바쁘게 살면서 우리는 삶의 중요한 문제들과 직면하기를 피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으려 바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문제투성이의 게으름이다.


-

이 글을 읽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나누었던 대화들 때문이었을까?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는 일이 자신과 맞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시간이 지나 경험치가 생기면 해결될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지금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어서 그것도 망설이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바쁜 탓에 시간이 주어지면 쉬기 바쁘지 무언가 깊게 고민하고 생각할 에너지가 남지 않는다며, 어쩌면 용기를 내야 하는 선택에 대한 고민 자체를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당연시되는 인생의 코스가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면 최선의 대학교를 다니고, 최선의 직장에 취업을 해, 최선의 결혼상대를 선택하고, 그렇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그리고 머리에 새겨진 이 코스에 따라 우리는 몸을 움직인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말이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니 일단 취업준비를 해서 흔히 말하는 ‘취뽀’를 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가진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DNA에 새겨져 있다.

그렇게 취업에 성공하며 최선을 다해 그 직장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아무리 이직률이 높아지고, 평생직장 없는 요즘 시대이고, 세대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안정적인 것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직업인이 되고, 일은 먹고사는 수단이 되고, 반복되는 업무와 일주일의 사이클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회의감을 느낄 때쯤 이미 회사를 관두자니 너무나도 많은 책임의 무게가 짊어져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이것을 현실 혹은 일상이라고 이야기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소수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 되면 결국 그 일도 일이 될 뿐이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저 글을 읽은 뒤 현실에 순응하며 살더라도.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타인들에 동화되는 삶이 아닌 나에게 맞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나 자신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내 삶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회피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 시간이 게으름 혹은 망설임 혹은 현실도피라고 불릴지언정. ‘내 마음의 중심에 다가가는 일’을 성실히 해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사람에 가까워지겠구나 싶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 청춘들은 꽤나 성실히 살고 있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아 괜히 뿌듯해지고, 동시에 찡함이 느껴진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엄마와 함께 게으름을 종이에 써서 빨간색 상자에 가둔 적이 있다.

몸의 게으름은 삶을 허비하는 일일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이 있어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값진 한번뿐인 내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게으름을 논하기 이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정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보내는 시간을 ‘게으름’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으려 바쁨을 유지하는 것이야 말로 문제투성이의 게으름일 테니 말이다.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시간들을 위해  또한 게으름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약간의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다짐해본다.

   서너 달의 게으름이라는 시간들이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된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고, 경험하는 중이다. 잠시 모든  멈추고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곱씹으며 그렇게 천천히 나에게 맞는 속도로 걸어 나가보자고, 오늘도 그렇게 나는 방향키를 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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