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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순간들과 무용함을 사랑한 까닭

행복도는 시덥잖은 농담의 빈도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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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평범하고 무던하게 살아가는 것만큼 힘든 게 없다. 각자 평범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어린 시절의 장난감과 놀이는 시간이 지나 무용해지지만, 그 순간의 행복은 소중하다. 순간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항상 미루게 되는 나 자신이 참 안쓰럽다. 행복의 척도란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을 얼마나 무용한 것에 쏟을 수 있는지가 아닐까? 언젠가 무용해질 것을 알면서도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까닭이다.


#따조 #7세고시 #가치 #무용함 #키덜트


#행복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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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순간들과

무용함을 사랑한 까닭


어린 시절엔 해적판 만화책, 구슬, 따조가 내 전부였다. 어릴 적 사촌 형 집에 놀러가면 만화책에 푹 빠져 시간을 보냈다. 해적판 만화책이라도 정의로운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포대에 쌓아둘 정도로 구슬을 많이 갖고 있던 사촌 형이 참 부러웠다. 특히 오리온 과자 속 따조는 몹시 갖고 싶었다. 따조는 딱지 놀이뿐 아니라 도박 같은 놀이의 칩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땐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해적판 만화책, 구슬, 따조는 이제 별 의미 없는 물건이 됐다. 어린 시절엔 이런 장난감이 전부였지만 나이를 먹으며 가치를 두는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에겐 입시 정보와 사교육이 최우선이다. 입시가 끝나면 그런 것들도 장난감처럼 버려지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 떠난다. 비싼 옷을 사려고 아르바이트에 매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유행이 지나면 그 옷은 빛을 잃는다. 결국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무용해지는 것에 가치를 둔다. 이런 실망이 반복되며 나이를 먹을수록 두 갈래 길을 마주한다. 시간이 지나도 유용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길과 무용함을 알면서도 순간의 쾌락을 좇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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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하는 심리는 여기서 비롯된다. 죽으면 소용없지만 살아 있을 땐 돈만큼 유용한 게 없다. 물가 상승으로 가치가 조금씩 떨어지긴 해도 차나 핸드폰 같은 물건보다 돈은 감가상각이 덜하다. 게다가 돈은 무용한 것을 사며 순간의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해주니 두 갈래 길을 고민 없이 모두 가게 해주지 않나. 순간의 쾌락도 가능하게 해주는 만능 아이템인 돈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순간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은 분명 한계가 있다. 아이에게 가장 소중한 건 즐겁게 노는 시간이다. 친구들과 웃으며 뛰놀이하거나 혼자 만화책을 읽으며 빠져드는 순간. 시간이 지나면 그런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조차 돈으로 행복을 사라고 가르친다. 비싼 장난감을 사줘도 아이가 진짜 원하는 건 부모와 구슬을 굴리는 무용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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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60분에서 방영한 ‘7세 고시’라는 말이 한때 화제였다. 어린아이를 입시 경쟁에 내모는 학원의 문제를 폭로하려던 방송은 오히려 그 학원을 알리는 좋은 홍보 방송이 됐다. 과거 드라마 SKY캐슬이 오히려 교육 컨설팅 붐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번 '7세 고시' 역시 자극적인 키워드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이 과정 속에서 고통받는 건 학부모다. 누군가는 그런 학원 정보를 알았지만 자신은 돈도 정보도 부족했다고 자책하고 마니까. 어린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행복은 정도가 아니라 빈도로 이루어진다. 얼마나 자주 행복한 감정을 누리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행복을 결정한다. 어렸을 때 무용한 것에 가치를 두지 못한 채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커서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원하는 학벌을 쟁취한다면 행복을 쟁취의 대상으로 치환해버리는 우를 범할 것이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남은 평생을 열등감 덩어리로 남아 우리 사회가 그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 염려된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행복하다는 진리를 그렇게 종종 잊고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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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이 이 가치의 이동을 자연스럽게 겪길 바란다. 어린 시절엔 무가치한 놀이에 빠져보고 청소년기엔 짝사랑의 아픔을 겪어보고 대학 입시엔 열정적으로 몰두해보길 바란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가치가 이동하는 걸 체험하길 바란다. 가치가 나중에 부여될 대상을 미리 경험하면서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의 자랑이나 미래의 꿈에 저당 잡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살지 않길 바란다. 제때 누려야 할 행복을 놓치면 나중에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키덜트라 불리는 어른들이 뒤늦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비싼 취미로 채우려 하지만 그때의 맛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치의 대상이 이미 이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순간의 행복을 미룬다. 친구와 깔깔대며 나눈 농담, 가족과 함께한 저녁 식사,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는 짧은 시간. 나중에 돌아보면 별것 아닌 순간들이다. 하지만 그 순간엔 온전히 몰두할 때 삶이 풍요로워진다. 어른에게도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런 여가의 시간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삶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무용함을 알면서도 무용한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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