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끝냈으며 나에게 무엇이 시작될까
# 무엇이 끝났는가
하나. 삼 학년 일 학기를 끝내다
수업들이 하나 둘 끝났다. 머리에 남은 게 없는 학기였다. 그나마 머릿속에 남는 건 법학의 이해 수업 내용 정도일까. 전공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교양만 기억에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전공 과목이라 해봤자 두 개뿐이거늘. 전산수학은 내용이 멕아리가 없었고 교수님이 멕아리가 없었으며 컴퓨터구조 수업은 내가 멕아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산수학은 왜 배우는지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들 재탕 조금, 컴공에서 쓰이는 수학 이론들이나 여타 잡다한 것들 조금을 섞은 느낌이다. 대부분 아는 내용이거나 어디 중학생을 갖다가 던져놔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2학년 과목을 지금 들은 탓도 있겠지만, 어디 가서 포항공대 전공 수업이라고 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희한하게도 나는 이 수업 시간마다 영어 과제를 하느라 내용을 거의 들은 바가 없는데, 고맙게도 2학년 친구들이 알아서 출석 점수를 스스로 깎아준 덕분에 성적은 잘 받았다.
컴퓨터구조 수업은 컴공 3대장 과목 중 두 번째 과목이다. 명성 만큼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알아먹지를 못했다. 중간에 수업을 한 번 안 가니까 그 뒤로는 아예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중간고사 이전에는 퀴즈 공부를 한 번 해야 했기에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CPU 파트가 다 나간 이후로는 흥미도 떨어져 버리고 내용이 괴리감이 느껴져 수업 듣기를 거의 거부하다시피 했다. 덕분에 시험은 두 번 다 말아먹었다. 그래도 랩 과제는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친구가 없어서 조원을 랜덤으로 배정받았는데, 순둥순둥한 23학번 동기가 걸렸다. 첫 랩 과제는 뭘 구현하라는 건지 모호해서 방향을 못 잡았지만, 이후로 CPU들을 구현하는 건 예상 외로 잘 풀렸다. 원래는 컴공 수업에서 팀플을 왜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조원 덕분에 디버깅 시간이 확 하고 줄어드는 걸 느끼고는 팀플의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요 정도가 이 수업에서 얻어간 것이 되겠다. 아, 베릴로그를 숙달했다는 것 정도를 더 넣을 수 있으려나.
교양 수업을 몇 과목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들어봤던 교양 수업 중 이번 학기에 들었던 법학의 이해 수업이 가장 재미있었다. 교수님부터가 굉장히 재미있으시면서 귀에 딱딱 꽂히는 톤으로 수업에 몰입할 수 있게 진행하셨다. 더불어 우리나라 정치 상황도 계엄 이후로 재미있게 돌아가는 터라 정치인 얘기할 것들이 많아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법학자의 시선에서 보는 정치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고, 배상과 보상이 어떻게 다른 건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수업을 들으면서 교양 과목들 필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정립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얻어간 게 많다. 성적까지 괜찮게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다.
둘. 지긋지긋했던 기숙사 생활을 끝내다
이번 학기 기숙사 생활도 드디어 끝났다. 집 밖 생활 6년 중 최악의 기숙사 생활이었다. 기숙사 생활이 안 좋을 이유는 룸메 문제밖엔 없다. 포항공대 사람이라면 선배로부터든 에타에서든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을 최고의 빌런이 내 룸메가 되었다면 믿겠는가? 주변 환경에 영향을 극도로 많이 받는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히 나는 좋은 환경을 찾아 소신있게 기숙사를 고른 것이었는데, 돌연 최악의 상황이 닥치리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 전말은 이렇다.
빛노을의 동아리 탐방 행사 준비를 위해 학교에 일찍 들어왔을 때였다. 행사 하루 전날 학부 생활관 신청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1인실이라도 잡아볼까 어렴풋이 생각했던 나였지만, RC에서 나온 이상 커뮤니티 센터가 아니면 생활관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조금 늦게 일어나 남는 자리에 신청하려 포털에 들어갔다. 구사들은 보통 호실 바깥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위치한다. 나는 이게 너무 불편했다. 다른 사람이랑 샤워를 같이 해야 한다는 사실도 불편하고, 하물며 용변도 바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게 너무 별로였다. 2024년 여름에 이미 이러한 구사에 살아본 적이 있으니, 이번에는 구사 중 유일하게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20동을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빈 자리로 뜬 20동 호실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서 신청을 넣고 노트북을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생활관 신청 승인이 완료되었다는 메일이었다. 승인 메일에는 룸메 이름이 같이 적혀져 나온다. 내 룸메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포항공대 최고의 빌런, 안 모 씨.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럴 수는 없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기숙사 신청을 취소하려고 했다. 눈에 보이는 버튼 중에 '입사 전 퇴사 신청'이라는 버튼이 있길래 무작정 눌렀다. 퇴사 신청이 불가능하다는 메일이 돌아왔다. 포기할 수는 없다. 이거 취소할 방법은 없냐고 회신을 보냈다. 답장이 없다. 다시 생활관운영팀 담당자분께 정중히 메일을 썼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답장이 되돌아왔다. '현재 신청 가능하니 참고 바랍니다.' 뭐가 신청 가능하다는 거지? 모르겠다. 퇴사 신청이든 취소든 뭐든 가능하다는 얘기겠지. 다시 포털에 들어가 마구 버튼들을 누르다가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입사 전 퇴사신청 버튼을 누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담당자분은 그제서야 이미 승인이 되었으므로 취소나 퇴사 신청은 불가하고, 내일 1인실 공실이 생기면 실변경을 하거나 3월이나 되어서야 2인실 남는 자리로 실변경이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아, 이럴 수는 없다. 정말 이럴 수는 없는 거다. 'XX' 두 글자 밖에는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
그 분과의 룸메 생활이 끝난 시점에서 조금의 리뷰를 해보자면, '생각보다는' 살 만했다. 생각보다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각보다는' 일 뿐이다. 에타에서 돌아다니는 희한한 소문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적어도 풍문을 듣고 살았던 포항공대생에게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어도, 일반인들에겐 절대 나쁘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범주의 생활상이 아니다. 맛보기로 몇 개만 알려주자면, 위의 세 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화장실 살림살이들 중 노란색 통들만이 그 사람의 것이다. 하나는 핸드워시, 하나는 샴푸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안 씻는다는 말이다. 안 씻는다. 그 체구에 땀만 흘려도 냄새가 날 것을 씻지도 않으니 어떻겠는가? 매일마다 환기를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한 가지 더. 좀처럼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식사는 모두 배달음식으로 해결한다. 방안에서 취식하는 건 기본이고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건 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충격적인 한 가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 자세히 묘사하진 않겠지만 진지하게 붙잡아놓고 뭐하냐고 물어볼라다 참았다. 말도 붙이기 싫어서.
어차피 방에 잘 안 들어가는 나였기에 그나마 견디고 살 수 있었다. 빛노을 개강 총회를 하면서 룸메가 아주 큰일이 났다고 읊었는데, 아는 선배도 그 사람이 룸메로 걸린 적이 있다고 하셔서 놀란 적이 있다. 이 분은 얼마 못 견디고 기숙사에서 나왔다고 하셨다. 아마 한 학기마다 룸메가 바뀌었을 테니, 피해자는 나와 이 분 외에도 꽤 많을 것이다. 이제 다음 피해자는 누가 될까? 놀랍게도 안 모 씨는 21학번이지만 아직 학부 5학년 과정을 하고 계시다. 복수전공을 하는 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적어도 2학기 정도는 더 다닐 것으로 보인다. 나는 2년 후에나 포항으로 돌아올 예정이니 알아서들 잘 살아보시길.
# 무엇이 시작될까
일 년 반 만에 다시 시작하는 서울살이와 어김없이 시작되는 계절학기
조금 더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번에는 계절 탓을 할 일도 없을 테니 계절이 지워지고 남는 자리에 여러 가지 경험들을 채워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시험 기간에 공부하기 싫은 참에 적어놓은 몇 가지 콘텐츠들이 있으니 이것들을 모두 완수해보는 걸 목표로 삼아야겠다. 리스트에는 지난 서울 살이 때 해보지 못한 걸 적어두기도 했고, 유튜브를 보다 저거 재밌겠다 싶은 것, 그리고 어릴 적 서울을 왔을 때 방문했던 추억의 장소도 몇 개 적어두었다. 실제로 뭘 하며 지내는지는 앞으로 올라올 글들을 통해 소개하겠다. 할 일이 많다.
사실 서울로 올라온 구실 자체는 계절학기이니만큼 계절학기 수강 자체도 중요한 컨텐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번에 신청한 과목을 미리 소개해보자면, 수업 타이틀은 '국가와 시민' 되겠다. 원래는 '국제정치학입문' 과목을 들을 생각이었다. 정치라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마주하기를 꺼리는 녀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도 하다. 최근에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만큼, 정치에 대해서 조금 더 배워보겠다 하는 마음으로 저 과목을 수강신청하려 했었다.
그런데 서울대 계절학기 신청 기간이 되니, 내 소신과는 달리 국제정치학입문 듣지 말라는 말이 꽤 들려왔다. 심지어 강의계획서를 보니 상대평가하는 과목이기도 해서, 불안한 마음에 교양선택으로 인정되는 다른 과목들을 급하게 알아봤다. 찾다보니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과목이 바로 이 '국가와 시민' 과목이었다. 출산율은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계엄이니 탄핵이니 하며 국내 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요즘 우리 사회와 이 모든 현상들의 집합인 '국가'라는 테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는 데에 좋은 과목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절대평가이기도 했고, 국제정치학입문 과목과는 달리 스누라이프에 강의평가가 나쁘지 않게 남겨져 있기도 해서 안심하고 수강신청할 수 있었다.
소신있게 신청한 과목이니만큼, 지난번 계절학기의 좋은 기운을 이어 이번에도 A+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아무쪼록, 나쁜 마무리들을 뒤로하고 좋은 시작이 다시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P 07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