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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나 May 07. 2020

  우울증과 함께 걷는 길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다.

쿵, 쿵, 쿵,
옆집은 아마 공사하는 소리로 들렸겠다. 망치질 소리쯤으로 여겼을까. 나는 내가 몹시 싫었다. 맞아도 된다고 여겼다. 아무도 날 때리지 않아서 내가 날 때렸다. 있는 힘껏 스스로 뺨을 갈겨 댈 때마다 잘못한 벌을 받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느끼며 나 스스로를 벌하다가 뺨으로도 안 되겠어서 머리를 박았다. 안방 구석에 풀썩 주저앉아 ‘죽어’, ‘죽어’ 속으로 내뱉으며 박았다.

울고 소리 지르며 화를 내던 나를 보더니 남편은 내 품의 아이를 데려가 거실로 나갔다. 그만하라고, 아이가 불안해하고 무서워서 울지 않느냐고 남편이 다그쳐도 그때의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아픔과 슬픔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바이러스로 여기는 남편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기만 했다. 폭주기관차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제어가 안 되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잦아들면 방문을 열고 내게 다가와줄 줄 알았다. 숨죽이며 울다가 소리 내어 흐느껴 울면 말이라도 걸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안다. 남편도 너무 무서웠고 불안했을 거다. 그저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을 거다.

그렇게 병원을 찾아갔다. 아줌마들 커뮤니티에서 괜찮아 보이는 추천 댓글을 읽고 무작정 찾아갔다. 정신과 병원을.


언제부터였을까. 숱하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임신 기간이 그렇게 행복하고 즐겁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었고 악몽을 꿨고 예민해져서 외출도 너무 피곤했다. 가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나 흔하게는 자기 비하적 발언은 연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군말 없이 꼭 안아주고 그저 곁에 있어주었다. 어린이집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은 스트레스가 많았다. 여러 문제가 뒤섞여서 뭐 때문인지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늘 심하게 다투시는 엄마 아빠로 인해 우울한 걸까.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봐도 남들 다 겪는 일들인데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힘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병원에 찾아갔을 때 원장님은 무조건 ‘현재’만 생각하라고 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가장 가까운 아이, 남편, 친구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하셨다. 우울증이 발현된 시기나 이유를 알려하는 것은 일단 중지. 지금은 일상을 지켜낼 때였다. 일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실 병원에 찾아간 큰 동기는 그거였다. 일상. 내겐 일상이 없었다. 하루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고 나를 비하하거나 남편을 죽일 놈처럼 대하거나 아이 때문이라 여겨야 했다. 아이가 무슨 죄인가. 남편은 또 무슨 죄인가. 이러다가 내가 죽든지 아이나 남편을 죽이거나 인생을 망쳐버릴까 두려워서 찾아갔던 것이다.

놀랍게도 처방받은 약을 먹고 세상이 고요해졌다. 평화로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는 게 실로 놀라웠다. 정말 진심으로, ‘이럴 거면 진작 병원 와서 약 먹을 걸.’하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그랬던가. 현대의학 만만세라고. 이전의 나의 화를 내지 않으려는 노오오오력이 허망하리만치 순식간에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나의 아픔에 자신의 아픔을 유예해왔던 남편이 이제 본인도 너무 아프다고 아프다고 말해왔다. 내 표정 내 말투 내 숨소리에 눈치 보다가도 욱했다. 그 이후로 더 미친 듯이 싸워댔다. 연애 때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 얘기 좀 들어봐. 내 아픈 곳 좀 들여다봐 줘.’라고 말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아 위로가 힘들었다. 머리로는 이제 내가 남편을 보듬어줘야 할 때라고 여겼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냉전도 있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지났다.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먹으며 치료 중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오픈하기 시작하면서 휘청대기도 했다. 그저 위로의 말도 이상하게 우위에서 나를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우울증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그저 햇볕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취미를 가지거나 일을 하거나 바쁘게 지내면 우울할 틈도 없다고도 했다. 왜냐고 묻고 약은 위험하다고도 했다. 병원 원장님의 진료 하에 약을 두 차례 줄이다가 끊어보기도 했으나 육퇴 후 혼자 이슬톡톡 한 캔으로 스스로 달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증상이 심해져 다시 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절대 음주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다시 병원을 찾을 때는 실패감이 컸다. 오롯이 나는 하등 쓸모없고 폐 끼치는 인생이라고 여겼다.

다시 병원을 찾으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보려 심리상담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상담 종결이 흐지부지 되었지만 꽤나 유익했다. 천안에서 하남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다녀오는 길은 나에게 선물하는 여행 같은 시간이었다. 직면이란 참으로 괴로웠다. 울고 또 울고 그랬다.


오늘 나는 화사한 핑크빛이 도는 제라늄 꽃화분을 하나 샀다. 아이가 핑크색 꽃을 키우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는데 장을 보다가 문득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먹어졌다. 몇 차례 화분을 죽이고 쓰레기통으로 버렸던 경험이 너무 미안해서 다시는 안 키우려고 했던 나인데, 다시 새로운 생명을 들인다는 것은 정말 중대한 사건이다.

요리며 살림이며 전혀 취미 없는 나는 최근 조금씩 요리도 하기 시작했다. 아이 이유식 이후로 반찬은 사다 먹이고 배달음식이나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야식을 챙겨 먹었는데 말이다. 내가 하는 요리 라야, 시판 된장찌개 된장으로 된장국 끓이기, 대충 다 때려 넣은 볶음밥이나 크림 리소토, 불량스러운 참치마요 주먹밥, 식은 밥에 치즈 넣은 밥전, 시판 육수에 면만 삶아 넣은 잔치국수 정도지만. 라면과 계란 프라이가 할 수 있는 요리의 전부였다.  장보는 것조차 너무 버거웠다. 그런 내가 어떤 요리를 해볼까 검색하며 장 볼 시간을 예상하고 일과를 계획하다니. 스스로 놀라운 요즘이다.

160도 안 되는 키에 70킬로를 육박하자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건강한 식단으로 정해진 시간에 끼니를 준비해서 먹는 것. 4주 차에 접어들었고 6킬로를 감량했다. 하루에 물 2리터 마시는 것을 오늘 시작했고 이 습관이 안정화되면 조금씩 운동하기를 추가할 예정이다.


병원에 처음 찾아갔을 때 원장님이 그랬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아오기까지 너무 힘들고 그래서 왜 이런 병이 나에게 생기나 하겠지만, 우울증을 건강하게 잘 넘기면, 그것을 계기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정말 그렇다. 이제야 알겠다.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던 특성들이 ‘그대로 있으나’ 이전에 걸어왔던 길, 예상되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이 생겼다. 마치 나무옹이에서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어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또 다른 가지가 자라듯. 그래, 그렇게 시작된 거다. 새로운 이야기가.


또다시 우울이 나를 잠식하는 순간도 찾아오겠다. 약을 먹든 먹지 않든, 상담을 받든 받지 않든, 이제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길 테고, 나는 이전처럼 잠식당하거나 이겨내려 고군분투하거나 종종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하겠다. 그리고 때로는 새로 생겨난 길 위에서 또 다른 방법으로 우울이란 녀석과 동행할 수도 있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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