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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7. 2018

마이클 셧슨: 뉴스의 사회학

2015년 3월 14일 

교과서적 지위를 가진 책


이 책이 한때 교과서적 지위를 누렸던 책이었다고 기록에 남고 잊혀질지, 아니면 개정을 거듭해서 정전(canon)의 지위를 확립하게 될지 궁금하다. 오랫동안 언론의 사회적 맥락과 역할, 그리고 문화정치적 함의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 <뉴스의 사회학>은 이제 약간 분열적으로 보인다. 이강형 교수의 훌륭한 번역에 힘입어 드디어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 책은 2011년 개정판이다.


개정판 <뉴스의 사회학>은 지난 10년 간 급변한 언론환경의 변화를 반영하고 그 함의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력은 뉴스의 형성과 뉴스의 형성력을 설명하기 위한 2003년 초판의 구도와 부딪히며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때문에 책 내부에서 ‘뉴스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과 ‘사회의 매체화에 대한 이해’가 분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셧슨은 2장에서 언론매체가 효과가 있다는 세간의 주장은 과장됐다고 비판하는데, 매체 효과를 일종의 주입식 교화로 보는 관점 때문에 그렇다고 지적한다. 대안적으로 그는 ‘문화적 모형’을 제시한다. 이는 (가) 뉴스는 정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며 (나) 공적 대화를 진작한다는 데 주목하는 모형이다. 결국 언론이란 여론의 ‘원인’이라기보다 여론을 형성하는 ‘마당’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이 형성하는 의미의 연결망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삶을 영위하는지 봐야 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개정판에 새롭게 더한 12장에서, 셧슨은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든다. '경계의 소멸'이다. 그는 (1) 독자와 언론인의 경계, (2) 언론매체 간 경계, (3) 전문 언론인과 아마추어 언론인의 경계, (4) 매체 사업모형 간 경계, (5) 언론사 내부의 편집국과 사업국 간 경계가 흐려진다는 관찰을 제시한다. 언론은 불안정해지고 그런 채로 사회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런 경계들이 모호해지는 현상으로 인해서 앞서 언급한 '마당'이 어찌되었는지 논의가 없다. 새로운 정서 공동체가 태동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 이런 변화에 따라 공중의 대화의 정도와 품질이 달라졌는지 설명이 없다. 11장에서 논쟁적으로 제시했던 언론의 역할, 즉 정부를 포함한 권력의 통제를 돕는지 아니면 공중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돕는지에 대한 절절한 고민이 21세기 언론매체 변화를 논의할 때 반영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의 3판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영향력인가 편향인가?


이 책은 짧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뉴스에 대한 거의 모든 사안을 다루는 데 그 수준과 솜씨가 가히 대가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셧슨의 우아하면서도 냉철한 분석 실력은 뉴스 편향을 해부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일단 그는 언론의 이념적 편향이나 정치적 당파성에 주목하는 것은 사태를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경계한다. 그에 따르면 편향은 ‘틀짓기(framing)’를 통해서 암묵적으로 작용한다. 편향이란 언론인이 기만적으로 은폐하거나 편견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인이 객관성을 추구할 때 그리고 전문직주의에 따라 세심하게 분별력을 발휘할 때 오히려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이는 놀라운 주장이다.


예컨대, 미국 언론은 20세기 초에 상업주의와 더불어 전문직주의를 확립했으며 객관성이나 독립성 같은 기본적인 윤리적 규범을 확립했다. 전문직주의로 훈련된 언론인은 무리하게 이념적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는 뻔한 방식으로 당파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사건을 이야기로 만들어 극화하고 그 안에 인물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가운데 사태를 협소하게 규정한다. 또한 조화와 규범보다 부조화와 일탈을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 정보원을 통해 기사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정부를 비롯한 공식 정보원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이것이 바로 ‘틀짓기’다. 이는 언론인들이 정교하게 발전시킨 “사소한 암묵적 이론들”에 기원한 것으로서 그들의 무의식적인 선택, 강조, 재현을 통해 구체화된다.


셧슨이 제시한 틀짓기를 인정한다면, 최근 새롭게 번역되어 소개된 코바치와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 제시된 주장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다. 코바치와 로젠스틸은 일단 언론인은 진실을 추구할 의무가 있고, 이를 위해 사실을 검증하기 위한 방법론적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만 보면 별로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이 과정에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언론인의 편견을 통제할 필요도 없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데 있다. 그들은 심지어 공정성과 불편부당성이란 전통적 언론의 규범을 포기할 것을 주장한다.


셧슨의 통찰을 빌려 평가하자면, 미국 언론인, 그것도 가장 진보적이고 책임 있는 부류에 속하는 코바치와 로젠스틸과 같은 고명한 언론인들이 ‘비편향적일 것을 명시적으로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 발 더 나가 전문성과 독립성 규범을 적용해서 보도한다면 암묵적 틀짓기에 따른 편향을 통제할 방법을 구하지 않아도 좋다는 면죄부를 얻으려 하고 있다.


셧슨은 편향이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역설한다. 그것은 전문 언론인의 ‘틀짓기’에 머물지 않는다. 관습을 선호하는 편향, 과학을 맹신하는 편향, 상류층과 부유층에 관심을 보이는 편향이 있다. 이는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기울어짐에서 연원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개정판에는 빠졌지만 초판에는 언론인은 자신의 일을 근사하게 정당화하는 편향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혹시 과도한 것 아닐까? 그래도 좀 낫다는 미국 언론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염려하는 셧슨이 오히려 신경과민은 아닐까? 내가 보기에 셧슨의 염려는 너무 세련돼서 문제다. 뉴스를 문화적 산물로 보고 문화적 영향력을 논하는 그의 시각은 Fox 뉴스의 무자비함이나 러쉬 림보의 무식함 앞에서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세련돼 보인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부 통제와 전략적 인터넷 댓글 달기가 횡행한 한국 언론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언론현실을 생각하면 셧슨의 염려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교묘하며, 코바치와 로젠스틸의 진실에 대한 강조는 무신경해 보일 정도로 요점을 피해 간다.



간결하고 섬세한 글쓰기


<뉴스의 사회학>의 개정판을 출판하기 3년 전, 셧슨은 <왜 민주주의는 미운 언론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그 책에서 언론과 민주주의 간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언론은 정치 영역의 밖에서 정치권력을 감시하고 사실을 규명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돕는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인용한다. 결국 정치권력의 자기 감시, 교정, 그리고 비판에 언론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언론이 비록 공식 정보원에 얽매여 있고, 전문직 문화에 갖혀 있으며, 관습적 규범에 매달리더라도 민주주의를 도울 수 있다고. <뉴스의 사회학>에 제시된 챕터들은 이런 셧슨의 흥미로운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안목과 사회적 관찰을 담고 있다.


우선 이 책의 4장과 5장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미국 언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아는 채하지만 사실은 요점을 놓치는 것이 미국이요, 또한 미국의 언론사이다. 그는 미국 언론인이 어떻게 상업적이면서도 동시에 전문직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또한 미국 언론은 어떻게 파편적이고 선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이며 해석적으로 발전했는지 요령 있게 제시한다. 셧슨의 <뉴스의 발견>이란 명저와 <선한 시민>이란 노작을 접해 본 독자라면 그의 역사를 기술하는 솜씨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전달한다. 역사를 기술하는 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데 어쨌든 읽고 나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다.


9장과 10장도 명문이다. 뉴스 수용자가 의례적으로 뉴스를 이용하며 최고의 언론인은 흔히 뉴스 수용자를 무시한다는 셧슨의 관찰은 반직관적이다. 그러나 그래서 흥미롭다. 마찬가지로 뉴스는 정보적 사실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이기도 하다는 관점도 통찰을 준다. 이 두 챕터에서 셧슨이 존경하는 선배 언론학자인 제임스 캐리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캐리는 언론을 민주주의를 돕는 제도로 보면서도 뉴스를 이용하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의례적 성격에 주목했다. 뉴스는 단순히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셧슨은 캐리의 주장을 발전시켜, 언론이란 공동체의 공통감각을 만들어 내는 의례적 실천이 일어나는 장이라고 주장한다.


언론이란 무엇인가?


셧슨은 이 책의 1장에서 언론이란 “공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현재 일에 대한 정보와 논평”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언론은 이것만 하는 게 아니다. 그도 인정하지만 언론은 음식점 평가나, 스포츠 결과의 예측, 또는 유명인사의 사생활을 뒤지는 일을 포함한다. 즉 공적이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뉴스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언론이란 셧슨이 애초에 규정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뉴스는 모순된 방식으로 형성되면서 다성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생활 정보나 가십은 그저 언론사가 정치보도나 탐사보도에 투자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만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중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회적 의미의 배경을 제공하고 생활의 여유를 제공한다. 그것은 문화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애초에 셧슨이 제공했던 언론에 대한 정의는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니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심지어 정보와 논평이라는 대상적 의미로 규정된 그 정의는 뭔가 요점을 놓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이런 관점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즉 공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안들이 형성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일화와 논평을 통해 일화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서 언론이란 단순히 뉴스를 만드는 일이라는 세간의 관점을 극복할 수 있다. <뉴스의 사회학>은 바로 이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 언론재단 간행 <신문과 방송> 2015년 2월호에 전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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