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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7. 2018

토스카: 살인과 강간의 오페라

2008년 5월 30일

이건 2008년 5월 30일인가봐요. 공연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쓴 글입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라보엠이라는 응답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투란도라면 반갑다. 하지만 대답이 토스카라면? 나는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면서, 왜요 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사랑, 혁명, 신앙, 자살, 협박, 살인, 고문, 섹스가 뒤범벅이 되어서 4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죽어야만 끝나는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도대체 나는 이 드라마를 왜 좋아하는가. 스스로 물어 볼 수밖에 없다.  


사랑과 혁명의 오페라, 아니 살인과 강간의 오페라를 보러 30일 코벤트 가든에 갔다.  


음악적으로, 토스카는 최초의 현대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벽두에 초연된 오페라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악극을 초연한 순간, 푸치니는 모든 이탈리아 오페라와 위대한 베르디를 초월해서 현대성을 실현한 작곡가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곧 만들어질 살로메나 보이첵과 같은 걸작들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게 될 현대성을 미리 살짝 보여주었다. 그것도 가장 아름답게. 불안정한 화음 속을 질주하는 불안한 주제가 실로 좋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증명한 최초의 오페라이다.  


배경은 로마, 시대는 1800년. 프랑스 혁명의 열기에 로마는 격동하고 있다. 다비드(혁명의 화가)에게 수업을 받은 재능 있는 화가 마리오와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성공한 가수 토스카가 살고 있다. 하지만 로마는 이 선남선녀가 ‘남을 헤치지 않고, 남에게 방해받지 않으며, 그저 단둘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다는 운명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교훈이다. 혁명과 반동의 도시에 사는 자들이여! 이런 도시에 사는 한, 사랑은 모멸과 어리석음으로 변하고, 예술이 음모가 되고, 맹세는 처절한 배신이 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나 혼자 잘 살자고 해 봐야 소용없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막이 열리면서 그 유명한 스칼피아의 주제가 제시된다. Bb M, Ab M, 그리고 E M! 성당 오르가니스트 출신인 푸치니는 어려서 이런 코드 진행이 일종의 악마의 화음이라고 배웠으리라. 푸치니는 이 뒤틀린 코드 진행을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악당인 스칼피아의 무지막지한 악마적 성격을 묘사하는 라이트모티프로 삼았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지휘자와 연습량에 따라서 들쭉날쭉 하기 때문에 안심할 수가 없다. 이번 토스카는 벌써 몇 년 동안 음악감독인 안토니오 파파노가 훈련시켰으니 별 문제 없으리라 기대했다. 실제로 별 문제 없었다. 날리는 현과 따듯한 혼이 보컬에 유려하게 대위한다. 원곡의 요구를 넘어선 최고의 연주는 아니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의 나쁜 연주도 아니었다.  


토스카는 마카엘라 카로시이다. 주로 베르디와 푸치니를 불러왔던 신인인데 이번이 코벤트 가든 데뷔란다. 리릭 톤을 갖추었으면서도, 성량이 크고, 하이엔드에서 강한 응집력을 보이는 목소리다. 따라서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에 제격이다. 게다가 연기력이 출중해서 웬만한 무대라도 모두 쓸고 다닐만한 포쓰를 과시했다. 하지만 멜로디 라인의 내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는 능력이 별로였다.  


칼라스의 토스카를 들어보면 (빅터 드 사바타의 EMI 음반), 작은 페시지 하나에서도 은근하게 감정을 응집해서, 통제력 있게 휘몰아치다가, 자연스럽게 늦추는 구구절절한 드라마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카로시는 칼라스가 아니다. 하지만 긴장과 이완의 드라마를 통제하는 능력이 없이 훌륭한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을까.  

경찰총장 스카르피아는 파올로 가바넬리가 맡았다. 그의 목소리 역시 고비가 아니다. 하지만 배역의 집요하고 어두운 성격을 잘 드러냈다.  


오페라 역사상 이런 악당이 별로 없다. 그는 살아서 마리오와 토스카를 고문하고, 협박하고, 강간하더니, 심지어 죽어서도 그들을 절망에 빠뜨린다. 스칼피아의 악마적 성격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1막의 결말이 무시무시하다. 보나파르트 혁명군이 패배했다는 (결국 잘못 알려진) 소문을 듣고, 반동의 도시 로마는 성찬가(Te Deum)를 부른다. 또한 승리를 확신한 경찰총장 스칼피아는 기도한다.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여기 정적을 죽이고, 그 애인을 뺐게 해달라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가 있다. 더러운 욕망의 기도가 반혁명적인 성찬가가 어울려 불안한 화음을 이루고 있다. 경찰총장 스칼피아. 도대체 너의 그 신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시선을 피해 위를 보니, 코벤트 가든 천정 뒤쪽이 살짝 열려있다. 그 위로는 런던 밤하늘이 틀림없을 텐데.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2막에서 토스카의 진정성과 신앙이 드러난다. 그녀는 악당에 대한 항복이며 또한 자신에 대한 고백을 담은 아리아, ‘나는 음악과 사랑을 위해 살아 왔다네 (Vissi d'arte)’ 부른다. 토스카는 베로나 출신으로 로마에 와서 대중적인 스타 가수가 되었다.   


그녀는 마리오를 만나기 전에는 일 밖에 몰랐다. 마리오는 파리 유학파이며, 볼테르와 디드로 등 자유주의 사상을 설파하는 절정의 훈남이다. 어떤 여자가 이런 남자를 싫어할까. 노래 밖에 몰랐던 열정의 토스카가, 그를 사귄 후 질투심에 눈이 벌게서 다른 여자들이 마리오를 채갈까 봐 매일 기도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토스카는 음악 밖에 몰랐다. 이제 그녀는 사랑 밖에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바보짓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정절을 버리는 연기도 마다 않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마리오와 단 둘이 방해받지 않고 살기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이 기도는 이루어질 것인가?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든 소녀들. 아직 사랑밖에 모를 나이이다. 광화문에서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 누군가의 사랑이고 또 누구를 사랑하겠지. 이들의 기도는 이루어질 것인가?  


3악장은 극적으로 간결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잡동사니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런 극-음악의 대위법은 푸치니가 세심하게 준비한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은 뒤에도 원통하게도 한이 남고 그래서 할 이야기가 남는다는 줄거리에 맞추어 준비된 것이다.    


마리오의 절창인 E lucevan le stelle가 흐른다. 결국 보나파르트의 혁명군이 이겼지만, 볼테르를 좋아했던 마리오는 사형을 앞두고 있다. 악랄한 경찰총장 스카르피아는 죽었지만, 여왕도 부러울 것 없었던 토스카는 그 죽은 자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해 보니, 이 오페라의 진짜 주제는 실패한 부활과 응답되지 않는 기도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할 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토스카는 죽어도 해결되지 않는 한을 남기고 떠났다.  따라서 이 오페라는 끝났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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