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5일
켄트 나가노를 처음 접한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레익스 프로그레스 음반이었다. 그 음반을 듣자마자 바로 언젠가 그를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바로 여기를 이렇게 해야 해’라는 의도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듯한 연출력이 대단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새로운 음반을 들으면서, 나는 그런 첫 인상이 더욱 굳어짐을 느꼈다. 또한 그의 도전적인 레퍼토리도 좋았다. 이번 5월 25일 몬트리올에서 드디어 그의 연주를 보았다. 베토벤의 피협 5번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연주 후, 나는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한 번 봐서 어떻게 그의 진면목을 알겠냐만, 적어도 이번 연주에서 두 개의 초절정 대작을 놓고도 어떤 중압감도 없이 오케스트라를 능숙하게 이끌어 완벽하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고전적 거장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연주 중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왼 쪽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에구, 머리 좀 다듬지’라는 생각에 약간 몰입이 방해됐다. 반대로 그걸 멋스럽게 볼 분들도 있겠지.
베토벤 피협 5번의 연주자는 틸 펠너. 요즘 젊은 연주자들에 대해 과문한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바흐나 베토벤 쪽으로 매우 성공적이란다. 완전 브렌델 스타일. 알고 보니 그에게 직접 배운 적도 있단다.
나가노와 펠너의 베토벤 2악장을 들으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연주를 문득 떠올렸다.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내한 공연! 그 공연 이후, 나는 베토벤 피협 5번을 ‘황제’라고 부르는 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 협주곡은 어떤 사람이나, 직위, 제도에 대한 것이 아닌 것으로 들렸다. 심지어 어떤 무엇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경험, 생각, 감정 등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그러나 분명하게 솟아오르는 어떤 정신 그 자체라고 믿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7번 레닌그라드.
이 교향곡은 ‘대한 것’이 맞다.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 그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저항의 경험에 대한 것이다. 테러에 저항하는 시민이 주인공인 교향곡이다.
1악장의 행진이 격렬해 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연주 전날 밤에 청계광장에서 촛불시위를 했던 시민들의 소식이 생각났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면서 갑자기 시대착오적 이미지가 떠올랐다. 서울의 거리를 배경으로 불길 속에서 소방수 헬멧을 쓰고 이리저리 뛰는 쇼스타코비치.
이 신경증적이고, 신경질적이고, 사교성 없지만, 동시에 간교할 정도로 출세에 민감했던 35살의 쇼스타코비치는 쏟아지는 폭탄 속에서 이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했다. 도시를 방어 중인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그의 방송과 그에 대한 신문 기사를 접했고, 적의 무참한 공격 속에서도 이 곡이 작곡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2악장에 접어들면서, 헬름 협곡 공방전을 앞둔 로한의 어린 병사들.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의 도시 방어전에 대한 헌정. 조나라의 침공에 성을 지키는 혁리와 연나라 양성 주민들. 이런 저런 생각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7번 교향곡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진의와 각 악장의 주제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 해석에 대한 논란보다 분명한 것이 이 곡에 대한 세계 시민들의 음악적 경험이다.
2차 대전 중에 토스카니니는 미국에서 이 교향곡을 초연해서 전국에 방송했고, 이 곡은 전세계에서 전체주의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 들여졌다. 1942년 미국에서만 62회 연주됐다.
이 교향곡이 바쳐진 도시, 레닌그라드 초연은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독일군의 봉쇄와 폭격으로 엉망이 된 도시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한 오케스트라는 라디오 오케스트라 하나 밖에 없었다. 의약품 보급에 얹혀서 7번 교향곡 악보가 도시로 공수되어 들어오자, 지휘자 엘리아스버그는 이를 연주하기 위해 악단을 수배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연주자들이 방어전을 치르면서 죽거나 실종되어 최소한의 악단도 만들 수 없었다. 지휘자는 대규모 편성이 필요한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그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 중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자들을 소집해달라고 했다.
전선에서 소집된 연주자들이 연습에 들어가고, 폐허의 시가지에 공연 포스트가 나붙었다. 마침내 42년 8월 9일 간신히 연주복을 준비한, 급하게 훈련된, 앙상하게 마른 연주자들이 공습으로 구멍이 뚫린 필하모니 홀에 오를 수 있었다. 연주 직전에 레닌그라드 방어전 책임자 고보로프 장군은 독일 포병 부대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최소한 공연 동안 만이라도 독일군의 포성이 잠잠해 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작전이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울지 않는 시민들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3악장 아다지오에 이르자, 켄트 나가노와 몬트리올 오케스트라 사이에 벌써 몇 시간 째 집중력을 유지하고, 교감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전반부에 베토벤, 후반부의 쇼스타코비치라니. 4악장에 들어서자 교감이 더욱 분명해 졌다. 이렇게까지 쥐어짜는 연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구가 많은 왼손 지시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4악장의 대조적인 템피도 압도적으로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옆 자리에 않았던 나이 든 거인족 같은 분의 배가 쿨렁거리는 것이 내 시야에 걸쳐 들어왔다. 클라이맥스에 들어서면서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숨을 참다가 이제는 그만 통제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나가노는 피날레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오케스트라 현의 보잉이 마치 진군하는 밀집대형 중장보병의 창처럼 절도 있게 움직였다. 관객들이 오히려 너무 흥분하고 있었다. 관과 타악기가 터지면서 오케스트라 투티. 그 속에서도 모든 악기군의 움직임이 각각 선명했다. 엄청난 힘과 집중력으로 몰아쳐서 피날레에 도착했지만, 나는 박수칠 기력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