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적 애국주의?
트럼프 현상은 세계적이다. 부족적 민족주의와 다수결주의, 그리고 기괴한 복고주의에 힘입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확장하고 있다. 민주화의 도정을 걷던 나라들은 ‘스트롱맨’을 만나 권위주의로 후퇴하는 중이다. 민주주의 본영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독일과 북유럽에서 극우파의 득세가 뚜렷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른바 트럼프 현상을 다룬 책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현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문제를 드러내고, 대안까지 일관된 논지를 전개한 경우는 별로 없다.
야스차 뭉크는 이 책에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득세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민주정의 함정을 소개한다. 민주정 내에서 ‘인간의 권리’와 ‘인민의 의지’가 상충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자유주의 원칙을 내세워 인민의 의지를 배반하는 엘리트적 정책노선을 다수에게 강요하거나, 반대로 비자유주의적 대중노선을 따라 소수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건 시민들은 민주정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갖게 된다고 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정책 간의 불협화는 불가피한가? 뭉크는 민주정이 위기에 빠진 원인으로 저성장과 빈부격차의 심화와 같은 경제적 원인을 제시한다. 더불어 공론장의 구조변동 등을 제시한다. 즉 새로운 정보공유의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전통적 언론매체가 의견을 공유하는 통로를 독점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적 원인이나 매체적 관점에서 제시한 원인들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중요한 요점이 따로 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동질적인 정체성이 변하는 현실에 대한 것이다.
뭉크는 민주정이 강력한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발전한 자유민주정 국가는 민족적, 인종적으로 다원화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다원성이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발전한 자유민주정은 다민족, 다문화, 다양성 정책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와중에 자유의 권리와 인민의 의지 간에 충돌이 발생한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기회를 얻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민족이나 인종, 또는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워 자유와 민주 간의 갈등에 환멸감을 가진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 유혹이 효과적이라는 게 문제다. 다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진보진영에 비난하면서 보편적 자유권을 내세우는 논리가 통한다. 인권을 주장하는 진보진영을 비웃으며 그건 단지 소수집단의 이해관계를 옹호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난민에 반대하고, 인종적 증오를 증폭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단순한 선동전략이 먹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야스차 뭉크는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다. 어떻게 싸우나? 오래된 ‘공중 교육’을 통한 방법이다. 교육이라니, 뭔가 고루한 제안처럼 들리겠지만, 뭉크의 폭발력은 그 내용에 있다. 포용적 민족주의 또는 포용적 애국주의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요청은 민족, 성차, 피부색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소수집단은 기본권의 보호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범자여야 한다! 모든 민족집단은 동일한 권리를 누리고 또한 존중할 것을 배워야 한다.
뭉크의 제안은 얼핏 매우 당연해서 물어 띁는 맛이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예컨대, 시민권 취득을 법대로 관리하는 일이나,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 등이 그렇다. 그동안 몇몇 진보진영의 지도자들은 뭉크가 생각하는 길을 반대로 걷고 있다. 소수자를 보호한다고 발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도입한다.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사소한 것을 만들어 버리고 마는 실수를 범한다. 진보진영은 때로 자유와 민주를 대척점에 세우고 갈등의 당사자가 되고 만다.
모두가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야스차 뭉크가 제시한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포용적 민족주의가 뭔지 그 내용을 각자 생각해서 말해 봤으면 한다. 아니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애초에 왜 작동하는 이념인지(혹은 삶의 양식인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