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눈에 띌 것인가, 후대의 선비를 향해 쓸 것인가
쓰는 자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은 저자가 있다. 내 경우는 루쉰(魯迅)이 그중 하나다. 내 마음 한 쪽에 루쉰이라면 무조건 부드러워지는 곳이 있다. 책방 매대에서 루쉰 문학상을 받았다는 알림 글에 홀려 샤리쥔(夏立君)의 《시간의 압력》을 집어 들었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산문정신이라고 외치는 광고 문안은 그러려니 했지만, 굴원(屈原), 조조(曹操),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을 탐구해서 엮었다는 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책을 열면 뜻밖에 소년의 무덤이 등장한다. 후손은 없지만 글이 남아서 350년이 지난 후에도 방문자를 초청하는 하완순(夏完淳)의 무덤이다. 아무리 조숙한 천재의 문장이라 해도 굴원과 사마천의 그것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읽다 보면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바뀌고 무너지는 시대에 선비가 세운 뜻은 어떤 천재의 문장보다 숭고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요점이다. 문장이 아니라 그것을 낳은 삶을 새기며 읽어야 한다. 예컨대, 이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빙그레 웃은 어부는 훌쩍 떠나고, 비쩍 말라 초췌한 굴원은 물고기 뱃속에 자신을 묻는다.”
그리고 두보의 명구를 인용한다.
“문장의 운명은 현달을 미워하고, 귀신은 사람 지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마땅히 원통한 혼령과 말하여 멱라강에 시를 던져 주리라.”
평론집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엮은 문단을 만날 기회는 별로 없다. 샤리쥔은 굴원이 스스로 위대한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면서, “위대하든 보잘것없든 사람이 자각적으로 역사에 진입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선언한다. 이런 글을 만나기 쉽지 않다. 시간의 무게를 견딘 문장이 아니라 삶을 탐구한 책이기에 만날 수 있는 문장들이다.
누구를 향해 쓰는가
얼핏 보기에 《시간의 압력》은 종잡을 수 없는 구조를 지녔다. 굴원으로 시작해서 조조를 거쳐서 도연명과 이백으로 진행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한나라 사마천으로 돌아간다. 이어서 법가인 이사(李斯)와 상앙(商鞅)을 논의하는 가운데 한무제(漢武帝) 앞에서 사마천이 변호했던 이릉(李陵)의 챕터가 끼어든다. 주제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광기를 논의하다가, 선비의 공명심을 이야기하다가, 역사가의 비극적 의식을 지적한다. 원래 《종산(鐘山)》을 비롯한 몇몇 잡지에 게재했던 글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기에 피할 수 없었던 혼잡함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이 책을 관통해서 가로지르는 숨겨진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 단서가 마지막 두 번째 장에서 상앙과 《상군서(商君書)》를 논의할 때 삐죽 튀어나온다. 저자 샤뤼쥔은 《상군서》에 ‘하나’라는 글자가 많이 등장하는 게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법가는 하나를 좋아했다. 패도를 주장하며 군왕이 변법으로 모든 것을 통일하고 획일화해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법가는 오직 한 명의 독자만을 염두에 두고 유세한다. 예컨대, 상앙은 다른 누구를 위해 말하거나 쓰지 않았다. 패도를 추구하는 군왕을 향해서 주로 말했다. 한비(韓非)도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 ‘법술지사(法術之士)’라고 칭했는데, 이는 군왕에게 법, 술, 세(勢)를 다뤄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사마천의 문장은 다르다. 《사기》는 ‘나중에 올 사람을 생각’하며 쓴 글이며, 따라서 군주 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법가의 소통 전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후세 사람 중에는 사마천이 ‘명성을 추구하는 데 급급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마천이 추구한 명성이란 당대 군주가 내려주는 작위와 은총이 아니다. 실로 한무제는 그를 의심해서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을 주었을 뿐이다. 사마천이 추구했던 것은 ‘훗날 어느 군자의 시선’이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글을 명산에 숨겨 놓고 이를 찾아 읽을 사람을 기다릴 뿐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당대 군주의 눈에 띌 것인가, 후세에 전해져 불현듯 언급될 것인가. 눈앞에 보이는 권력자를 향해 말할 것인가, 얼굴도 이름도 모를 후대의 선비를 향해 쓸 것인가. 이 사안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유가의 전통은 법가 쪽에 가깝다. 《논어》 위령공편에 보면, 군자는 죽기 전에 명성을 알리기를 원한다고 했다. 사마천은 죽은 후 전해질 명성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내가 은인자중하고 구차하게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비루하게 죽어 후세에 문채(文彩)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자신의 문장이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남아서 후대의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며 썼다는 이야기다.
비첩이 되는 글쓰기
샤리쥔의 문장은 때로 격정적이고 도발적이어서 불편한 경우가 있지만, 그의 해석은 역사적 평가의 갈래를 따라 세심하게 길을 찾는다. 그래서 길 위에서 그저 멈추기 어렵다. 모든 면에서 최초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굴원에 대한 해석부터가 그렇다.
굴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이념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다. 굴원은 무수한 이해와 오해 속에서 숭배와 멸시를 교차로 받았다. 샤리쥔에 따르면, 근대의 량치차오(梁啓超)와 왕궈웨이(王國維)에 와서야 굴원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가능해졌는데, 고대의 문장가나 학자들은 각자의 흥취와 이념에 따라서 굴원을 활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예컨대, 후한의 역사가 반고(班固)는 젊어서는 굴원을 격찬하다가 중년에 어명을 받아 《한서》를 편찬한 뒤, 입장을 바꿨다. 그는 굴원이 “재주를 드러내 자신을 과시하고”, “군주를 원망하고 윗사람을 풍자했으니”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는 정반대로 굴원의 글에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읽어냈다. 샤리쥔은 주희를 두고 “굴원을 공문 태묘의 희생으로 삼았다”고 평가한다.
굴원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 중 하나가 그의 시에서 비첩의 심리를 찾아서 침소봉대하는 일이다. 비첩 심리란 ‘군왕에 대한 사랑과 원망의 마음’을 뜻하는데, 과연 굴원의 노래 속에서 초나라 회왕에 대한 사랑과 원망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굴원의 시는 이런 정조에 머물지 않으며, 실은 그의 원망은 특정한 권력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곤경에 빠진 지조가 높은 사람이 가질만한 보편적 심성을 생생하게 드러낼 뿐이다.
비첩 심리를 굴원이 발명한 것도 아니다. 샤리쥔은 군왕의 은총을 바라며 충성을 경쟁하는 궁정에서 비첩 심리가 싹튼다고 말한다. 정치가 있는 곳에 비첩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와 문장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하는 자들이 비첩 심리를 계발하고 또한 활용한다. 예컨대, 《시경》에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애정 시들이 담겨있는데, 후세의 유생들은 그것을 읽고 신하가 군주를 애모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멋대로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시경》에는 또한 군신 간의 정이라는 해석적 틀에 억지로 꿰맞추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생생한 구절들도 있는데, 유생들은 그것이 단지 음란한 표현일 뿐이라고 부정하며 도외시했다.
샤리쥔은 출세를 바라며 권세가에게 자신을 재주를 팔고 싶어 하는 자들이 비첩의 심정을 토로하기 좋아했다는 데 주목한다. 예컨대, 당나라에 주경여(朱慶餘)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당대의 명사 장적(張籍)에게 자신을 천거하면서 이렇게 읊었다.
“신방에 간밤 내내 붉은 촛불을 밝혀, 새벽에 당 앞에서 시부모에게 절을 올리렵니다. 화장을 마치고 낮은 소리로 남편에게 묻노니, 눈썹 화장 진하기가 유행에 맞나요.”
속되게 말하자면 정말이지 다 벗고 나선 격이다. 선비가 권력을 탐해 자신의 알량한 글재주를 활용하려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루쉰은 굴원과 사마천을 연결했다. 그는 《사기》가 역사의 절창이요, 운율 없는 <이소>라 평가했다. 이런 루쉰과 대조해서 반고 부자의 사마천에 대한 비난을 톺아보자. 샤리쥔은 반고 부자로서는 사마천의 기이한 광채를 읽을 만한 역량이 없었을 뿐이라고 논한다. 특히 인물에 대한 탐구가 부족해서 도량이 좁고 왜소한 역사가 심원한 《사기》의 서술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고 부자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밝힌다. 비첩 심리 때문이다. 황제 권력에 봉사하기 위해서 ‘통치의 밑천’을 만들기 위해 글재주를 활용했던 자들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
문장이 드러내는 것
《시간의 압력》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인은 조조다. 조조를 말하면 조조가 온다. 모두가 조조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나관중(羅貫中)도 조조를 좋아했다. 마오쩌둥은 “그래도 나는 조조의 시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난세의 간웅은 심오한 시혼의 소유자였다.
샤리쥔이 경탄해 마지않은 시인은 이백(李白)이다. 그는 굴원처럼 고결하지 않고, 도연명 같이 은일하지 않고, 소식과 같은 통찰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시인들이 대거 출세하던 시대에 이백은 오히려 충분히 출세하지 못한 탓을 세상에 돌리며 한탄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끊임없이 감동을 준다. 언제나 어디까지나 스스로에게 진정했기 때문이다.
《시간의 압력》에 숨겨진 악당은 한비다. 샤리쥔은 그를 위해 별도의 장을 마련하지 않았지만, 이사와 상앙을 비판하면서 그리고 순자를 논하면서 계속해서 한비를 불러낸다. 그리고 이렇게 그의 문장을 평가한다. “급하고 날카로우며, 무겁고 난해하며, 각박하고 괴상한데, 동시에 문채가 찬란하다.” 그리고 한비의 글을 읽어갈 때마다 등골이 서늘하다고 고백한다. 그의 글에서 자기반성이나 양심, 사리사욕이 없는 담백함과 온정이 없는 ‘캄캄한 동굴’을 봤기 때문이다.
한비의 진정한 제자는 그의 동창이었던 이사였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진나라 기록이 아닌 경전을 모두 불태워야 한다는 정책을 입안했던 이사 말이다. 그는 역사를 단일화하고, 언론을 폭력적으로 통제하고, 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는 환관 조고(趙高)와 모의해 진시황의 죽음을 숨기고 후계를 농단했는데, 그가 후계자 호해(胡亥)의 은총을 얻기 위해 조고와 경쟁해 남긴 글이 《상독책서(上督責書)》로 남아있다. 감찰하고 문책하는 일이 곧 군주의 도라는 글이다. 이 도는 《한비자》에서 왔다. 법으로 인민의 생각을 통제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는 생각이 여기에서 왔다. 이사는 ‘지록위마(指鹿爲馬)’하며 조고와 충성을 경쟁하다 대역죄로 몰려 요참형을 당했고 그의 삼족은 사라졌다.
쓰려는 자들에게
쓰는 자라면 누구나 문장을 구한다. 좋은 글을 읽고 새기며, 언젠가 그런 글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쓰고 또 쓴다. 그런데 쓰는 자로서 가늠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자기 글이 어떻게 남아 어떤 평가를 받을지 미리 알 수 없다. 누구도 감히 굴원이나 사마천과 같은 명성을 바랄 도리는 없지만, 그들이 남긴 글의 육덕(六德)에라도 미치는 독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 선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기사 한 줄을 쓰고, 보고서 한 쪽을 만들어도 '예상된 독자의 눈'을 의식한다.
《시간의 압력》은 문장을 구하는 자들이 우러러볼 만한 봉우리와 피해야 할 구렁텅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봉우리와 구렁텅이를 이루는 육신의 운명은 또한 그저 역사 속의 인물일 뿐이라는 사실도 드러낸다. 그들은 때로 미친 척하지만 명징하고, 잔혹한 듯하다가 부드럽게 다른 정을 표시한다. 출세를 바라지만 속옷을 벗지는 않고,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인 줄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흉내내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의 문장이 아니라 그 삶이어야 한다.
2021. 7. 19.
*이 기사는 <신문과방송> 2021년 7월호 '미디어포럼'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kpfjra_/222433536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