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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Sep 08. 2024

<사주는 없다> 서평

이재인 (2024). 바다출판사.

나는 어려서부터 사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비판을 하고 다녔다. 얼마전 사주명리학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이 책이 나왔다기에 당장 읽고 싶었다. 책에서 새롭게 배울 바도 있겠지만, 그보다 내가 떠들었던 사주비판이 어떤 형태로든 이 책에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한 잔 하셨던 분들 중에는 내가 ‘사주 비판’이라며 1분짜리 또는 3분짜리 썰 푸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거다. 둘 중에 1분짜리 논박은 사주팔자 측정론을 비판한다. 간략히 말해서 사주의 요체인 구조론(오행이나 뭐니 간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사주에서 팔자를 식별하는 측정체계를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이다.  


ㅇ 구조론: 개인의 사주팔자를 특정하면 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다. 

 ㅇ 측정론: 개인의 생 연월일시를 알면 사주팔자를 특정할 수 있다. 


연원일시란 본디 나눔이 없는 시간을 누군가 임의로 기준점을 정해서 조직적으로 구획한 결과이고, 그 구획을 기록한 달력은 시대, 지역, 권력에 따라 변천하는 문화적 구성물이다. 도대체 어떤 달력과 어떤 기준을 사용한 간지를 맞춰봐야 하는지 누구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비하면 날자 변경선이나 시간 변경선에 걸친 사주를 특정하는 문제는 오히려 사소하다. 


<사주는 없다>를 읽어보니 과연 내 1분 논박의 요점을 이미 정약용도 주장한 바 있다. 역법이 달라 연월일시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른데 그것을 간지로 표기해서 운명을 추정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생각해 보면 역시 그가 조선이란 변두리의 학자였기에 이 요점을 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조선에서 측정한 사주를 갖고 고대 중국의 낙양 또는 장안 표준시에 따라 BC104년 동지 밤을 기준으로 삼아 간지를 배정한 측정체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팔자를 식별해야 하는 그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게다. 




내 3분짜리 논박도 사주명리학의 핵심 전제들, 즉 음양오행설이나 용신론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이 비판은 구조론과 측정론 간 모순을 다룬다. 따라서 누군가 사주명리학의 구조론을 믿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통렬하게 반박할 수 있다. 이건 일종의 내재적 비판으로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 


당신이 사주론이 핵심 전제인 이른바 ‘천인감응론’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 ‘천인감응론’에 따라서 생년월일시로 쪼개진 시간의 차이만으로 인간의 운명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과 인간은 시간의 차원을 통해서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공간을 통해서도 접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한 문명의 도구를 만들어 자연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통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우주의 기’를 받은 결과가 경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론을 믿는다면, 위도에 따라 달라지는 운명도 무시할 수 없다. 일주나 시주의 차이만큼이나 하얼빈에서 태어났느냐 아니면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는냐가 중요해진다. 위도가 중요하다면 고도도 마찬가지고 다른 환경변수들도 그렇다. 논지를 확장해서, 인간이 자연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조직한 문명의 대응체계, 특히 풍우, 온랭, 화진 등을 다스리는 제도들의 돈독함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사주명리학은 경도가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셈인데, 나는 당연히 이 주장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주장을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사주명리학의 설명체계 자체가 그 자신의 핵심 전제인 ‘천인감응론’에 비추어 보아 부실하다는 비판이다.


<사주는 없다>를 읽어 보니 내가 말해 온 ‘천인감응론’을 실제 후한의 왕충이 <논형>에서 자연정명론이란 이름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동중서의 <춘추번로>에 있는 천인감응론을 개선한 내용이라고 한다. 현대 사주명리학은 이런저런 오래된 주장들을 인용해서 형이상학적 전제로 삼고 있는데, <사주는 없다>의 후반부는 이런 전제들을 효과적으로 박살내고 있다. 특히 간지를 음양오행과 연결하는 해석론, 사주 간 관계를 보는 십성론, 그리고 사주에 대처하는 용신론 등이 모두 타당한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는 점을 잘 드러냈다. 많이 배웠다.  


자, 이제 누군가 <MBTI란 없다>를 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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