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감정은 늦게 온다
고추장은 참 묘한 양념이다.
오래 묵혀 둔 항아리 뚜껑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
비좁은 그 속에서 계절을 몇 번이나 통과하며
붉고 진해진 발효의 숨결이 먼저 피어오른다.
그 숨결 속에는 햇볕의 잔향이 묻어 있고,
그 잔향이 표면의 붉은빛 위로 부드럽게 번질 때,
마치 오래된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혀에 처음 닿는 맛은 의외로 달콤하다.
순간, 이게 과연 고추장인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포근하게 감싸주는데
그 부드러움은 오래전 밥 위에 고추장 한 숟갈을 얹어 건네던
어머니의 손길처럼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온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혀끝에서 미세하게 톡 쏘는 열이 번지고,
목 안쪽과 가슴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마치 매운 음식을 먹을 때,
처음엔 매콤한 양념처럼 다가왔다가
잠시 후 입안 전체를 태우는 화기로 번지듯.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혀가 얼얼해지고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
이상하게 화부터 난다.
그건 단순히 입이 아파서가 아니다.
매운맛은 몸에 작은 비상벨을 울린다.
심장이 빨라지고 숨이 거칠어지면,
뇌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불편함을 ‘분노’로 변환한다.
이렇듯 우리는 매운 음식을 먹다
옆 사람에게 괜히 짜증을 내기도 한다.
자극이 강하면 감정은 쉽게 오해를 한다.
분노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엔 참을 만하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스스로를 달래며 넘기고,
상대의 입장을 먼저 헤아린다.
웃으며 넘기기도 하고,
그 순간에는 파문이 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말투, 그 표정,
무심하게 흘린 한 마디는
내 안 어딘가에 조용히 달라붙는다.
겉으로는 잊힌 듯 보여도
속에서는 은근히 졸아들며 점점 진하게 농축된다.
마치 뜨거운 가마솥 옆에서 묵은 고추장이
서서히 수분을 잃으며 걸쭉해지듯.
그렇게 눌어붙어 있던 감정은
예상치 못한 순간,
기름 위에 고추장이 ‘퍽’ 하고 튀듯
격렬하게 치솟는다.
나는 오랫동안 화를 잘 못 내는 사람이었다.
되도록이면 참고,
좋게 말하려 하고,
상대의 사정을 먼저 생각했다.
겉으로 보면 평온하고 너그러워 보였지만,
실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그 뿌리는 진흙탕 속 깊이 박혀 있었다.
억눌린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침전되어,
마침내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해 터졌다.
울분이 쌓이면 병이 된다는 말, 적울성병(積鬱成病).
분노는 바깥에서 불씨가 던져져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먼저 끓어오르는 열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종종 스트레스를 풀겠다며 매운 음식을 찾는다.
매운 찌개, 매운 볶음, 매운 국물…
“이 매운맛으로 속에 쌓인 걸 다 태워버리자” 하고 다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매운맛이 오히려 새로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혀가 얼얼해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몸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데
정작 우리는 ‘맛있다’고 되뇌며 더 삼킨다.
풀려고 했던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고,
매운맛이 만든 불편함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속을 더 조인다.
고추장은 불에 닿아야 제맛을 낸다.
찬 상태에서는 그저 걸쭉한 양념이지만,
불 앞에 서면 숨겨둔 향과 맛이 살아나고,
달콤함 속에 감춰 둔 매움이 고개를 든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억울한 장면, 오래 방치된 상처,
반복되는 무시 앞에서
평소엔 차분하던 사람도 조용히 달궈진다.
열이 임계치에 다다르는 순간,
그동안 눌러온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노화중소(怒火中燒).
겉모습이 조용하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조용한 것은 아니다.
고추장의 매운맛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입안을 지배한 뒤,
목을 타고 내려가 속을 데우고,
심지어 한참 뒤에도 속을 콕콕 찌른다.
화도 그렇다.
말을 쏟아낸 뒤에도
속은 좀처럼 편해지지 않는다.
뒤늦게 찾아오는 자책과 허무함이
천천히 퍼져나간다.
때로는 화를 낸 사실보다,
‘내가 화가 났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
더 슬프다.
사람들은 화를 내면 후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화를 참는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후회라는 것을.
참고, 또 참았는데
상대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그저 나는 속에서만 끓고,
식고, 굳고, 썩는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무거워지고,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진득하게 눌어붙어
마침내는 분노가 아니라
무기력이라는 이름의 독이 된다.
분노조절 장애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은 다스리지 않으면 언젠가 폭주하고,
한 번 금이 간 관계와 신뢰는
다시 붙여도 흔적이 남는다.
그러니 고추장도,
분노도,
그 양과 온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
너무 적으면 맛이 밋밋하고,
너무 많으면 모든 맛을 지워버린다.
매운맛이 우리를 즐겁게도 하지만,
한순간 화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노는 매운맛처럼 입에 먼저 오는 게 아니다.
달콤한 말 뒤에 숨어 있다가,
그 말이 얼마나 쓰고 아팠는지를
나중에서야 알려준다.
가장 위험한 분노는
소리치는 화가 아니라,
조용히 끓고 있는
고추장 같은 마음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 끼의 맛이 되기도 하고,
평생의 상처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