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양념학 - 된장

그리움은 오래 묵을수록 깊어진다

by 정담훈

5화. 그리움은 오래 묵을수록 깊어진다


✒️ 글: 정담훈

오늘 꺼내볼 양념 : 된장


메주 같은 기억


된장은 처음부터 구수하지 않다.

콩을 삶아 찧어 메주로 빚고,

겨울의 바람과 햇살 속에 매달아 말린다.

메주는 투박하고 거칠며,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를 풍기지만

그 덩어리 없이는 된장이 태어날 수 없다.


그리움도 이와 같다.

처음의 그리움은 덩어리 진 기억이다.

삼키기 힘든 감정의 응고체,

아직은 날카롭고 불편한 무게일 뿐이다.


청국장 같은 그리움


어떤 그리움은 청국장처럼

짧은 시간에 빠르게 발효한다.

마치 삶은 콩을 따뜻한 방 안에 두었을 때

하룻밤 새에 숨 가쁘게 부풀어 오르듯,

그리움도 문득 몸속에서 급격히 부풀어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의 그리움은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마치 장맛비가 예고 없이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셔 버리듯, 마음을 단숨에 흔들어 놓는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청국장이 오래 두면

곧 상해버리듯, 이런 그리움은 길게 머물지 못한다.

한순간 마음을 휘젓고 나면 금세 흩어지고 만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처럼 허무만 남기고,

다시 일상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그러나 그 짧은 발효의 순간은 분명 강렬하다.

입안에 머금자마자 세차게 퍼져오는 청국장의 향처럼,

갑작스러운 그리움은 순식간에 마음을 점령하고,

그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잠깐의 만남, 우연히 들은 목소리, 한 장의 사진이 던져준 기억이

청국장처럼 순간의 뜨거운 그리움이 되어

우리 안에서 발효되는 것이다.


된장 같은 기다림


반대로 된장은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지 않는다.

메주를 장독에 눌러 담은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시간과 계절에 맡겨진다.

봄의 비가 스며들고, 여름 장마가 흙냄새와 뒤섞이며, 가을 햇살이 묵직한 온기를 보태고,

겨울바람이 서릿발처럼 장독대를 휘감아도

뚜껑은 묵묵히 닫혀 있다.


그 기다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짠맛은 서서히 가라앉고, 거친 냄새는 어느새 부드러워지며,

시간이라는 손길이 여러 겹으로 쌓여

마침내 깊고 단단한 맛을 빚어낸다.

된장이 완성된다는 것은

곧 시간이 제 몫을 다했다는 뜻이다.


그리움도 이와 같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를 찌르고,

쓰디쓴 눈물처럼 삼키기 힘들지만

그 감정이 오랜 세월을 건너면서

둥글어지고 가라앉는다.

한때는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었으나

결국에는 구수한 향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덮고 지탱한다.


그리움은 시간을 이기는 법이 없다.

오히려 시간을 통과하며 변화한다.

마치 된장이 발효되며

쓸모없는 찌꺼기를 가라앉히고

맑은 국물만 남겨내듯, 그리움도 아픔은 줄이고

남겨야 할 것만 남긴다.


결국 우리를 아프게 하던 것이

살아가게 만드는 힘으로 변한다.

그리고 언젠가 밥상 위에 올라온

된장국 한 그릇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녹여내듯, 묵은 그리움도 결국

삶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국물이 된다.


장독대와 고향의 향기


된장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시골의 풍경이 따라온다.

흙마당에 줄지어 선 장독대,

뚜껑 위로 소복이 앉은 서리,

여름 장마에 젖은 흙냄새,

담벼락에 널린 붉은 고추와 매달린 마늘,

부엌 안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된장국


이 모든 장면이 곧 그리움이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냄새인데도,

된장 냄새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기억은 고향의 마당으로 달려간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의 장독대는

내게 그리움의 원형 같은 풍경이었다.

겨울 햇살에 말라가던 메주의 냄새는

늘 코를 찡그리게 했지만,

저녁 밥상 위에 된장찌개가 올라오면

그 냄새는 전혀 다른 얼굴로 변했다.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

땀을 뻘뻘 흘리며 먹던 기억.

그 맛은 결국 ‘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고,

멀리 도시에서 살게 된 지금도

문득 그 향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의 발효


된장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콩에서 메주로, 메주에서 청국장과 된장으로.

발효의 길은 다르지만

시간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움도 그렇다.

처음엔 칼날 같은 상처였지만

시간이 흘러 장독 속에서 삭아가며

구수한 국물이 되고,

결국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된장에는 햇빛과 바람, 계절과 기다림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움에도 우리가 살아낸 시간,

놓쳐버린 순간,

그리고 다시 이어지고 싶은 마음이 겹겹이 스며 있다.

그리움은 단순한 보고픔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발효시켜

우리를 뿌리에 닿게 만드는 맛이다.


된장은 오래 묵어야 깊어진다.

그리움도 오래 묵어야 삶을 덮는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단단해지고,

그 발효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사람이 된다.

된장은 세월의 맛이고,

그리움은 결국 우리를 고향으로 이끄는 길이다.

오래 묵을수록 깊어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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